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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07. 2023

책에도 운명이 있다

어느 날 내 책 - 사물의 소멸,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동영상 속의 아이는 아주 차분해 보였다. 『국부론』이라 제목이 써진 두꺼운 책을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고 있었다. 나레이션 하는 이는 아이의 아버지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니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자폐 증세였다고 한다. 책은 아이가 “선호하는 특정 감각을 편하게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도구”였다. ‘그림이나 글씨의 패턴을 보거나 책장을 넘길 때 이미지가 바뀌는 것’을 보고, ‘책 페이지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넘기고, 책장을 입으로 뜯고 씹었다’고 한다. 결국 아이는 책과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읽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책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사람보다는 사물과 감각 전반에 몰입하면서 무표정이 되었고 부모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다. 

    내게는 책을 보고 만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그래서 혼자 물었다, 너도 저런 거 좋아하잖아, 그런데 넌 책을 왜 읽느냐고, 아니, 너는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작가 정희진이 말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받는다. (『정희진처럼 읽기』 프롤로그에서) 


    ‘또하’라 불리는 동영상 속 아이에게도 책은 그런 용도였던 것 같다. 아이는 책으로, ‘감각처리 문제로 발생하는 자신의 불안감을 조절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아이 아빠는 필기도 안 한 노트를 넘기는 걸 보고 기함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책은, 우리가 내용을 “읽기” 전에 이미 그 물성만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또하는 아직 “책을 읽는 게” 아니다. 독서에 대한 정희진의 말을 계속 들어 본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좋은 책은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생명, 세로토닌(행복감을 생산하는 뇌의 화학 물질)이다. 위로는 깨달음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즐거움(樂)에 풀잎을 얹으면, 약(藥)이 된다. 책은 즐거움이자 풀잎이자 약물이다.’

    정희진이 책을 통해 받게 되는 위로는 ‘읽는다’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한다. 읽어야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이 있어야 위로를 받는 거니까. 그렇다면 정희진은 ‘책을 읽는다’기보다 ‘글을 읽는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하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는 말도, 아이가 책을 보고 만지기는 했어도 그 속에 담긴 글이나 그림 등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책은 즐거움이자 풀잎이자 약물이다’라는 정희진의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으면서도 여기엔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란 오랫동안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었다. 그 종이의 시작은 진짜로 풀잎이고 지금도 책은 식물체의 섬유에서 추출한 펄프로 만들어진다. 어린 또하는 씹고 뜯고, 어른 정희진은 약처럼 먹는 “책”. 정희진이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고 한 말은 매우 적절하다. 사람이 목소리로, 글로, 그림으로, 그 무엇으로든 표현하는 모든 건, 그것을 전달하는 몸이 필요하다. 책은 정신과 몸을 지닌 사람처럼 영성과 물성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또하의 읽기도, 정희진의 읽기도 ‘모두 책읽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 두 가지를 합쳐야 하는 게 아닐까?

    사춘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작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아직 남은 어렴풋한 빛에 책등 위 글자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가라앉고 평화로웠다. 서점 좌판 위에서 유난히 흰빛으로 유혹하던 영어 독해 문제집은 해가 다 지도록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책 읽는 건 늘 칭찬하시던 아빠 몰래 가슴 설레며 읽던 『제인 에어』, 『고원에 심은 사랑』 같은 소설들, 짝사랑하던 성당 오빠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던 시집, 성장통 가득한 이야기들, 심부름 보냈더니 서점 아저씨에게 혼났다고 투덜대던 남동생 소리 시끄럽던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있었다. (프랭클린 자서전, 카네기 인간관계론, 그런 책은 기억에 없구나)

    그런 추억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한 번에 몇백 권씩 책을 만진다. 코로나 시국이라 소독도 꼭 필요하니까 소독 티슈로 문질문질 책 전체를 비벼대기도 한다. 어떨 땐, 책이 길 잃은 아기고양이같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비비적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습게도 나는 고양이 털에 알레르기가 있다. 그처럼 책을 만질 때면 마스크를 써도 풀풀 이는 먼지에 재채기는 필수다. 

    또 다른 도서관에서는 망가진 책을 고치는 봉사를 한다. 『어느 책수선가의 기록』을 펴낸 재영 책수선가가 정의하듯 ‘책을 수선한다는 건 그 책이 살아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모습들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책을 수선하기 전, 훼손된 부분을 구석구석 살핀다. 공공도서관 책에는 특히나 여러 사람 손길이 닿아 있다.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삼만 원이 넘는 고가 책은 드물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소위 최신 베스트셀러들의 경우, 화려한 표지와 달리 정신없이 찍어낸 떡제본(무선제본)이 보통이고 종이로 된 특성상 무르고 약하다. 이런 물건이 무수한 사람 손을 타면 변하는 그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고 예측할 수도 없다.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매뉴얼도 있고 짬짬이 교육도 받는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수많은 동영상으로 공부도 한다. 재밌는 건, 사람의 손을 탔기 때문인가 훼손된 모양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다른지, 정해진 방법도 있고 권장 절차도 있지만 종이접기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경우 없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이번 주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작업하고 있다. 검은 벽돌처럼 단단한 720쪽짜리. 넌 어디가 아프니? 모두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용 가운데 처음 두 장,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와 ‘우주 생명의 푸가’가 떨어져 있다. 한두 장 떨어져 있으면 그것만 접착제 사이로 밀어 넣어 붙이지만 이렇게 100장 정도가 떨어져 나가면 책을 통째로 뜯어 다시 풀칠해 묶곤 한다. 그런데 세 번째 장 이후의 종이들은 참으로 견고하게 붙어 있었고 책이 너무 두꺼워 전체를 다시 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앞의 100쪽을 잘 다듬어 가지런하게 붙여보자, 하고 한 장 한 장 상태를 살펴보았다. 점입가경…. 군데군데, 여러 번 떨어졌었는지 여러 사람의 손길로 불규칙하게 풀칠이 되어 있었고, 어느 곳은 투명 테이프가 사이사이 빡빡하게 붙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 다르다지만 똑같은 건 어쩜 이리 똑같을까. 서울대생 필독서라니 사람들이 많이도 빌렸을 테지. 이리 두꺼우니 시간에 쫓겨 반납했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고 해도 아마 두 번째 장 정도까지 읽고 끝까지 모두는 겁이 났거나 포기했을 것이다. 유튜버나 연예인, 학자들 말고 꼼꼼하게 다 읽은 사람을 지금까지 주변에서 딱 두 명 보았다. 나만 끝까지 못 읽은 건 아니네. 넷플릭스에 있는 다큐라도 본 게 다행이네. 그러면서 한편으론 섭섭하다. 떨어졌으면 떨어졌다고 말을 해주지 이렇게 테이프를 붙여버리면 어떻게 하나 말이다. 어차피 책 자체가 낱장 종이를 접착제로 붙여 묶었으니 잘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앞에서 누군가는 진짜 부주의했겠고 또 누군가는 자신 탓을 했을 것이다…. 헤진 곳은 보강하고, 풀이 떡이 돼버린 곳, 테이프를 붙여 놓은 곳을 잘라서 정리했다. 패잔병 같던 책이 다시 살아 서가로 돌아갔다. 부디 2장까지 해 놓은 이 누군가의 노력을 살펴,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로 4장 ‘천국과 지옥’으로 용기 내 읽어 나가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있기를. 마지막 13장의 제목은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다. 그 부분을 펼쳐 읽어 본다. 책등이 꺾이진 않는지, 고친 부분의 흐름이 끝까지 어울리고, 책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게 고쳐졌는지 궁금해서다.

    일본 것을 번역한 어린이 책 『살아있는 직업 그림 사전』은 처음 보는 책이다. 『코스모스』에 풀칠해 놓고 마르길 기다리는 사이 고쳐보기로 한다. 아이들 책은 아이들이 좋아하면 할수록 찢기고, 뜯기고, 사라지고 변형이 심하다. 보는 아이들 나이가 어릴수록 이것저것 묻어 있는 게 많다. 우리 아이 어릴 적 소방관, 소방차, 경찰관, 경찰차, 그런 그림들이 있는 책을 좋아하던 시간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곧 기분이 좋지 않다. 직업과 관련된 많은 사물 이름이 깨알처럼 박혀 있었는데 일본 신사와 승려가 절과 스님으로 소개되고, 나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사 물건들이 우리 말인 것처럼 시시콜콜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 만듦새도 전혀 배려가 없다. 꽤 크기가 있는 책인데 소책자처럼 가운데를 기계로 드르륵 박아 껍데기만 씌워 놓았다. 이 책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망가졌다기보다 처음부터 뒤틀리고 찢어지기 쉽게 만들어졌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어서 빨리 무언가 되길, 그걸 꿈으로 갖길 바랐을 것이다. 아니, 아니야,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왔거나 일본어 쓰는 사람들이 말 배우길 바라면서 읽었을까. 실을 풀어 펼쳐서 찢어진 곳을 잘 붙이고 다시 꿰맸다. 부스러진 겉표지를 보강해 다시 쌌다. 어떤 이들이 무슨 사연으로 이 책을 만나는지 상상하기 어려워도 그들에게 내 서툰 손길이 소박한 물음표로 다가가길. 김초엽이 『책과 우연들』에 그린 ‘책이 있는 일상’처럼.      


    나는 이 결말의 일시적인 평화가 좋았다. 책은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다. … 이렇게 균열된 양쪽 세계 사이에서 이따금 우연한 충돌이 일어난다. 읽을 생각이 없던 책을 우연히 집어 드는 사건. 서가를 무작정 따라가다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는 분야의 서가에서 헤매게 되는 일. 말도 섞을 일 없다고 여겼던 이들과의 독서토론, 그 우연한 충돌도 균열을 꿰매지는 못하지만, 잠시나마 적과 어깨를 맞대고 눈을 붙이게 한다. 책은 찬찬히 생각하게 하니까. 눈앞의 낯선 세계를 곰곰이 살피게 하니까.   

 

    현대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였다. “저, 테이블에 전시된 책은 장갑을 끼고 보셔야 해요.” 젊은 남자 사서가 지적한다. 야속한지고. 1940년대 미국 집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삭 넘어가는 종이의 촉감이 손끝에 설렜다. 사진 속 가구들의 표면을 만지고 있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비치된 라텍스 장갑을 낀다. 눈앞에서 세상이 바뀐다. 내 손은 장갑 속에서 땀만 뻘뻘 흘렸다. 1940년대 미국 거실 모습은 갑갑한 라텍스 고무장갑으로 기억되었다. 


   희귀한 책을 볼 때 하얀 면장갑을 끼는 건(아니, 그 어떤 장갑이라도) 오히려 책을 더 망가뜨릴 수 있다. 희귀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책을 만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맨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대신 손을 비누로 깨끗하게 씻고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로! … 그럼 라텍스 장갑을 끼면 안 되냐고? 물론 그것도 안 된다. 맨손으로 종이의 상태와 무게를 직접 가늠할 수 있을 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긴다든지, 만지기를 멈춘다든지 한다. 하지만 장갑을 끼면 손끝 감각이 함께 차단되어 둔해진다. 게다가 라텍스 장갑은 종이와의 마찰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특히나 오래된 종이라면 더 쉽게 찢거나 구겨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어느 책수선가의 기록』에서)


    『사물의 소멸』에서 한병철은 ‘촉감은 모든 관계의 본질적 요소다.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결속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벤야민이 인용한 “책에도 운명이 있다(Habent sua fata libelli)”라는 라틴어 속담을 소개해 준다. ‘책은 사물로서, 소유물로서 존재하는 한에서 운명을 가진다. 그런 책은 역사가 남긴 물질적 흔적들을 보유하고 있다.’ 벤야민의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다. 「나의 서재를 정리하며unpacking my library」라는 글이었다. ‘단테의 신곡, 스피노자의 에티카,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책에는 그들만의 운명이 있다. 수집가는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 책만 아니라 그 책들의 복제품에도 운명이 있다.’ 

    우리가 손에 들고 읽고 있는 책은 사실 인쇄해서 복제한 물건이다. 그러니 ‘사물’로서의 책도 저 나름대로 이야기가 있다 즉, 사람의 흔적을 간직한다는 얘기다. 재영 책수선가도 말했다. ‘찢어진 종이를 붙이고, 무너진 책등을 바르게 세우고, 사라진 조각을 채우면서 책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회복시켜 주고, 새로운 커버나 지지대, 혹은 케이스를 만들어 주며 책에게 새로운 시간을 약속하다 보면 사람의 인생처럼 책에도 한 권, 한 권 각자만의 책 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오늘날과 같은 정보 시대 한병철이 본 예술은 ‘물질을 의도없이 사물로 조형하는 수작업이 더는 아니며’, ‘생각을 소통하는 생각 작업’일뿐이고 예술품은 본래 사물임을 잊었다. 그에게 ‘정보’는 ‘반(反)사물’이다. 노동과 손을 열렬히 신봉한 하이데거의 의견을 빌어, ‘생각하기는 수작업이다. 손은 생각하기를 확고한 아날로그 과정으로 만든다’ 말한다. ‘운명이란 건 디지털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전자책은 사물이 아니라 정보’라며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못한다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손이 없으니까라고 단언한다. 한병철이라는 인물에 대해 극과 극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돌고 있었다. 호기심에 한 번 훑어보려던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건 이 “손이 없는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는 그 말이었다. 

    나는 한병철이 소개하는 ‘충심의 사물’, ‘주크박스’ 대신에 ‘책’을 대입해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크박스[책]의 마법은 그 사물이 주변적인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평범한 것들, 통상적인 것들, 또는 덧없는 것들에게 현대를, 여기 있음을, 집약성을 부여하는 것에 있다. 사물은 존재를 강화한다.

오랜 사용이 비로소 사물에게 영혼을 준다. 오직 충심의 사물만 영혼이 있다 … 그는 확실히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이 생각이 왠지 위안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사물들은, 더 이상 사람 손길이 닿지 않으면, 그냥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빠르게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니 책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니 도서관은 더 필요하지 않다고 외치는 자본주의자들의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정보라는 것 역시, 분산되어 남겨진다지만 생각보다 큰 저장, 연결 공간이 필요하고, 이런 물리적 공간은 숭례문이 타버린 것보다도 더 허망하게 존재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작고 평범한 사물에 담긴 흔적이 더욱 소중해진다. 

    또, 아날로그 복제품인 책을 디지털 자료로 옮기는 일엔 그 작업에 동원되는 육체노동자들의 존재가 필수라고 한다. 아나소피 스프링어와 에티엔 튀르팽이 엮은 『도서관 환상들』에서 읽은 말이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대도 디지털 프로세스 안에는 언제나 익명의 누군가가 존재한다…. 구시대적이고 기꺼이 고독한 책이라는 영역만큼 의도적으로 지워진 인간 존재에 대한 증거가 슬프고도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 

    

    오늘도 어린이 자료실에 신나게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을 본다. 도서관 인기 최절정의 책『흔한 남매』시리즈를 볼 수 없냐고 찾아 달라는 아이들이, 그 손에 끌려 다니는 엄마 아빠들이 데스크로 서가로 왔다 갔다 한다. 쿠키런, 카카오 프렌즈, 텐텐, 마법천자문 같은 만화책들이 무더기로 서가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신이나 모여들고, 한 아름 들고 가 쌓아 놓고 읽다가 북카트에 우다다 던져 넣는다. 아이들 손가락이 바쁘게 닿은 책은 종이가 군데군데 찢기고 가끔은 사탕이 끈적하게 붙어 들어오기도 한다. 함께 보는 책 깨끗하게 봐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해야 한다지만 나는, 녀석 책이 참 달았겠구나, 책을 읽는 건지 밥을 먹는 건지 몰랐을 거야, 싶어 속으로 웃는다. 물론 종이가 쩍 하니 붙어버리거나 젖어서 혹은 강아지가 물어뜯어 책이 끝장이 나 버리면 그렇게 만들어버린 녀석들은 꼭 한 번 만나 얘기해 주고 싶은 맘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스마트폰 세대인 아이들에게도 책은 여전히 끌리는 물건인 건 틀림이 없다고 믿는다. 

    결국 책이든 디지털 정보든 사람이라는 존재가 묻어 있고, 이는 손으로,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일해 만져주어야 존재할 수 있으며, 오래오래 살아간다. 굳이 의식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마법처럼 저절로 매혹되는 일이라 말해주는 이들이 있어서(또하의 모습이 그래서 내게 예뻤나 보다), 그 사실이 인간 존재에 위안이 된다고 하는 그들이 있어서, 그 사이로 어떻게든 들어가 같이하고 싶다는 욕망이 조용히 일었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책을 부지런히 서가에 정리해 꼽고, 수선하고 또, 글을 쓴다. 나는 도서관이라는 참으로 소란스럽기도 한 고독 속에 있다. 언젠가 나 같은 누군가가 내 손길이 스친 책을 지금 나처럼 바라봐 주는 일도 일어나겠지. 어슴푸레 보이는 책등의 글자를 흘낏하기도 하겠지. 한 번 만져 주리라 상상만으로도 나는 지금 여기에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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