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 Aug 08. 2023

위대한 유산

그러니 행복해요, 우리

    “야, 이런 ○○놈○끼, 개○끼야!” 

    내 차 본넷을 탕탕 치며 지르는 소리이니 나한테 하는 소리가 맞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봐, 이런 소리. 영화 『베테랑』 같은 데에서나 듣던 말이다(옮겨보려 했더니 맞춤법도 모르겠네). 딱 그런 말을 좀 하게 생겼다. 개구리 다리에 헐렁이는 바지, 짙은 남색의 낡은 점퍼, 방한모자, 검게 그을러 잘게 접었다 펼친 것같이 구깃구깃한 얼굴. 얼굴까지 어떻게 보았느냐면, 아저씨가(맞다. 이러는 아줌마는 본 적이 없지) 차를 탕탕 치면서 앞 유리창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기웃기웃했었기 때문이다. 듣고 있는 나는 MBTI 검사 결과 INFP에 A형 피가 도는 유리멘털(‘멘털이 쿠크다스’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더군) 소유자. 갑자기 눈물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놈, 아저씨는 분명 ‘놈’이라고 했다. 왜 저래, 눈 안 좋은가 보네, 차 선팅 있는데 보이겠냐, 뻔해. 나는 흥분해서 정신없이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물론, 속으로만). 빨간 차니까 여자가 운전한다고 생각했겠지, 큰 차 아니라고 얕보는군, 무식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차를 탕탕 치고 욕지거리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평생 배운 게 쌈질인가 등등. 그런데 아저씨, 열여덟 해가 어쩌고 하지 않고 ‘놈’이라 하고 있다. 생경한 그의 욕이나 발화되지 않은 나의 분노나 모든 것이 공허해지는 단어. 나는 ‘놈’이 아니니, 그의 욕이 내게 정확하게 닿지 않고 나의 욕 아닌 욕 역시 어이없긴 마찬가지다. 상황에 맞는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놀랐고, 서로의 말은 그 놀랍고 두려운 감정을 허둥지둥 쏟아 낸 결과였던 거다. 정신이 들었다. 

    잠이 좀 부족했다. 아들 학원엘 데려다주고 멍하니 우회전을 하다 보니 대각선에서 차들이 신호를 받아 다가오고 있었고, 당황해 서고 보니 횡단보도 위였던 거다. 보행신호등은 켜있고 건너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움직였다. 달려와 길을 건너려던 아저씨는 목숨에 위협을 느꼈던 거다. 내가 마치 영화를 보듯 안전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탕탕거리는 아저씨의 주먹질을 막아 주는 철판을 두른 자동차 안에서 짙은 선팅으로 나 자신을 숨길 수 있던 덕분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 아저씨의 격한 지적은 옳았다. 우회전에 관한 법규가 강화된다. 그러고 보니 차를 두드렸으니 아저씨 손만 아팠겠군. 그렇게 달려드는 바람에 지레 겁먹어서 황급히 돌아 나왔잖은가 말이다. 아침에 좀 정신없는 이가 실수했거니 생각해 주지 좀, 하고 서운했던 마음이, 그 실수로 엄청난 가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고, 정신 좀 차리고 얼른 죄송하다고 했어야지, 하는 반성이 되었다. 그래도 ‘○○놈○끼, 개○끼’ 하는 소리는 머릿속에서 여간해 사라지지 않았다. 욕을 하며 길을 가던 그 아저씨는 내가 아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런데 헐렁한 그 바짓자락만은 낯설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휜 다리와 헐렁한 바지가 그렇게 쓸쓸하고 안타까울 일일까? 욕을 하는 아저씨의 호통 소리가 그렇게 슬플 일인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걸까? 무언가 있는데, 하기도 했는데, 하지 않은 것만 같고 그러면서 그런 것이 있었나 싶어 지기도, 그것이 맞는가 싶어지기도 한다. ‘글쓰기는 아기를 낳는 것과 같다. 이것이 최선이다, 하는 지경까지 애를 쓸 수밖에 없다.’ 아기를 낳아 본 적도 없이 34살에 요절한 시몬 베유가 한 말이다. 나는 무언가를 애를 써서 기억하려 하면서도 또 그것을 기를 쓰고 모르고 싶다.      


    여름, 그 열기엔 아무리 무다리라도 반바지를 입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0년을 넘게 입어온 여름 면 반바지를 버렸다. 이렇게 덩치 큰 내가 입어도 흘러내리는 바지를 입고서 아빠는 연신, 바지춤을 잡아 올리느라 구부정하게 걸었다. 가뭄에도 비를 몰고 다니던 아빠와 긴 장마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가 3년 정도 앓은 병의 이름은 여전히 모른다. 돌아가시기 2주 전 갑작스럽게 그것이 혈액암의 일종이라고만 들었을 뿐이다. 피부암도 아니고 피부병으로 죽었다는 사람은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었고, 우리나라에서 한두 케이스 보고가 있을 뿐인 희귀병이어서, 만난 의사 선생님들 모두 진단해 내지 못했다. 내내 몹쓸 증상만 있고 실체는 알 수 없는 병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이 그랬을까?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하고 살갗이 계속 벗겨져 피부가 이제 막 어미 배에서 나온 어린 짐승 같았다.       

    스스로 물이 많은 체질이라고 말하곤 하는 엄마는 매일 아빠의 몸무게와 혈압과 당수치와 소변량, 식사량과 식사 종류 등을 기록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몸에 약을 바르고 보습제를 바르면서, 이름은 물론 형체도 없는 적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이때 엄마가 남겨 놓은 간호 일기를, 아빠가 돌아가신 지 13년째 되는 요즘에서야 처음 읽었다. 그 여름, 병원과 직장을 왔다 갔다 하던 마지막 시간 들, 엄마가 기록을 하고 있던 것은 알았지만, 그걸 읽어 볼 생각은 못 했다. 엄마도 보여주려 않고 묻어두고만 있었다. 보여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는 조금 망설였다.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기록을 보여주면서, 보여주려고 다시 읽어 보다 며칠 잠을 못 자고 마음이 아팠다, 고 했다. 내가 엄마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그랬다, 책이 나온다 해도 나만 읽어 보련다, 책을 썼다고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요. 괜찮아요. 누가 듣던 그저 한번 말이나 해보려고요.    

 

 ‘상을 다 치르고 기억을 되새기며 쓰는 것이다 … 사람이 야속하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빠가 가신 그날은 기록이 아니라 이렇게 엄마의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았다. 호흡이 멎고, 의사가 사망 선고 하기까지, 언제 아이들이 왔고, 그 아이들이 울어서 가여웠고…. 나 역시 그날, 밤을 지새우고 함께 맞은 아침이었는데, 1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어 그런지, 그날의 일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나, 고만 싶다.      


 ‘정신없이 일이 닥쳐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 6개월을 병원에서 함께 했지만, 요즘은 잠깐잠깐 이별을 생각하고 가슴이 맵고, 따가워, 애들 아버지 몰래 혼자서 울기도 했지만, 시신을 꼭꼭 싸서 냉동실에 넣었어도 믿기지가 않는다.’      


  읽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걸 왜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하는 건지 나에게 묻고 또 물으며 짙은 갈색의 노트를, 열었다, 덮었다 한다. 54킬로라는 몸무게를 보니 하얀 병원 침대와 함께 한없이 야윈 아빠의 모습(환갑 지난 연세에도 평행봉에서 훨훨 날던 단단한 몸은 어디에)이 떠오른다. 곁에서 모든 것을 날 것으로 겪어야만 한 엄마의 고통과 안타까움, 슬픔이 노트를 가득 채운다. 엄마는 견디고 견딘다. 견뎌야만 한다며 견딘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현실이 어찌할 수 없이 휘몰아쳐만 들 때 엄마는 이렇게 탄식한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 좀 더 괜찮은 인생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더 나쁜 것만 바라보고 나는 좀 낫다, 하고 참고 웃으라는 걸까. 왜 나만….’ ‘왜 나는 이런 운명을 타고났을까 … 이럴 때 내 살붙이 형제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다 있는 그런 형제도 하나 없는 외톨이….’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젖었다 마른 습자지처럼 찢어지던 아빠의 그 상처가 떠올랐다.     


‘야속한 사람 … 미안해요! 아무튼 나 미치겠어요, 여보! 보고 싶은 마음에 달려가 만나는 보고 싶은데, 아! 참, 한편으로는 속도 상해요. 난 어째서 이 세상에 나오지 말게 하든지, 왜 나오게 해서, 사람들 앞에 마음 놓고 내놓을 수 없는 인간으로 나왔나, 하고요 … 내가 이런 말 하는 이유를 당신은 잘 알죠….’     


   얼마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이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장례도 하루로 끝냈다. 엄마는 삼촌들이랑 이모랑 장지에 다녀올 동안 외할머니와 함께 있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이모는 내게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다. ‘잘 살지?’ 나는 못 살지는 않으니 그렇다고 답했다. 삼촌이나 이모나 안 본 지가 20년이든가, 30년이든가, 한다. 악수로 인사하며 찬찬히, 푸석하고 주름이 접힌 얼굴과 흰 머리카락을 지우고 옛 모습을 기억해 낸 것이 나름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들도 나하고 같을 것이다. 시간은 온화하게 흘렀다. 엄마만 외할머니 집에 남겨 놓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그 집 앞에서 엄마를 태우고 강남고속터미널까지 모셔드렸다. 터미널에서 엄마는 허기진 듯 식사, 커피에 단 케이크까지 허겁지겁 드신다. 외할머니는 치매가 있으셔서 엄마 이름도 모르고 엄마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하고 모질게 생각해 본다.      


    ‘그분들은 나의 친부모님이다. 난 마음속 깊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한다. … 그런데 내가 남편을 잃고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저 사위라고는 여기는지 남들도 해주는 전화 한 통화가 없다. 찾아주는 것은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다. 막상 이렇게 혼자이고 보니, 너무나 그립고, 전화라도 한 통화, 하고 기다려진다. 에이, 바랄 것을 바라자 하고 내팽개 치다가도 다시금 전화벨소리에 귀가 간다. 잘 들 계시나 오늘은 무척 보고 싶네.’  

   

   벤츠를 타고 온 큰삼촌에게 엄마는 인감과 위임장, 도장을 넘겼다. 법적으로는 형제지간이기 때문이다. 인감과 도장을 돌려받으면 아마도 이젠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엄마 마음속 연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의 육신의 어머니는 나만 보면 그리고 무슨 말만 하면, 네가 복이 없다, 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그때마다 난 나도 모르게 반감이 든다. 다른 이들 모두가 다 그렇게 말들을 해도 적어도 어머니라는 분은 자식에게 할 말이 아닌 듯하다. 어느 땐가 하룻밤 자고 오려고 갔다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180도 달라져서 어둡기 전에 집에 가야겠다 하고 나온 적이 있다. 최고로 기분이 안 좋다.’   

   

    늘 참고 남을 더 배려하며 표현이 소극적인 엄마다. 우유부단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줄만 알았는데, 엄마의 마음속에도 단호한 면이 있었다. ‘최고로 기분이 안 좋다’를 읽는 순간,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기뻤다.      

    도대체 그 ‘복’이란 게 뭔가. ‘복’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배당되는 몫이 많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다. 팔자가 사납다는 뜻의 ‘박복하다’, 운수 따위가 사납고 복이 없다는 뜻의 ‘기박하다’도 있다. 어지간히 복이 없다는 뜻의 ‘헐복하다’, 운명이나 팔자가 기구하고 복이 없다는 뜻의 ‘명박하다’는 말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안상순의 『우리말 어감 사전』에 의하면 ‘복’이란 ‘삶에서 누리는 좋은 운수’를 가리킨다. ‘삶을 풍요롭고 활기차게 해주는 상서로운 힘’으로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장수하는 것’, ‘부유한 것’, ‘건강한 것’, ‘좋은 덕을 가진 것’,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 등을 일컫는다.      

    그런데 엄마, 할머니가 엄마더러 복 없다, 그랬다니까 나까지 기분이 안 좋았어요. 60년 동안 어디 있었는지도 몰랐던 할머니가 엄마라지만 뭘 아신다고 ‘복 없다’ 그러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었을까요? 아빠랑 백년해로 못 하고 혼자가 되어서? 부유하지 않아 보이니 그런 걸까? 복 없어서 버렸다는 그런 못된 말은 아닐 거고, 부모 자식 될 인연이 없었다는 자기 팔자에 대한 한풀이일까? 이 세상에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엄마는 끝까지 할머니 자식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겠다고 했죠. 마지막까지 엄마를 지켜주고 싶다고도 했죠. 가끔은 엄마랑 할머니가 좀 젊을 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이제 와 만나다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요즘은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아. 할머니는 할머니 가족과 함께 꾸려온 인생이 있는 거고, 우리 가족 역시 할머니를 모르고도 지금까지 잘 헤쳐나가며 살았잖아요. 다행히, 할머니도 오래 사시고 엄마도 건강해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게 복 받은 거 아니면 뭔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왜 나만…?’ 하며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우리 엄마는 남들 다 있다는 ‘엄마’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어서 모든 슬픔을 혼자 삭여야 하는 운명이었나요?      

    왜 나만 엄마가 없는가, 왜 나만 형제자매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가, 하는 탄식의 그 소리가 내겐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게 들렸다. 요즘은 이런 말들이 흔하기 때문이다. 왜 나만 그때 집을 못 샀지, 왜 나만 집이 없어, 왜 나만 세금을 더 내는 거야, 왜 나만 외제 차가 아니야, 왜 우리 애만 S.K.Y에 못 가지, 왜 나만 월급이 이 모양이야, 왜 난 이렇게 생겼지, 왜 나만 미워해, 왜 나만 손해 보냐 말이야 …. 유튜브 채널을 보는데 그런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읽었던 시간이었다. 어, 우리 엄만 엄마가 없는데. 언젠가 한참을 전화로 이야기하다가 엄마는 말했다. “나도 엄마가 있어.” 그 당연한 말이 그렇게 평화롭고 따뜻했다. 깊은 우물에 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 그래, 형제‧자매 없는 사람 많다. 점점 더 많아진다. 우리 아들도 외아들이다. 더구나, 엄만 외톨이가 아니죠. 자식들이 있잖아요. 손주도 있어요.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있고요. 뭐가 더 필요할까요? 복? 없어도 돼. ‘복’은 받아야만 가질 수 있고 달아날까 늘 조바심 내며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행복’은 내가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 “행복하여라!” 하잖아요. 그러니 ‘행복’해요, 우리.     

    건물도 있고 서울대 상대를 나오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을까, 이모가 이삼십 년 만에 만나 처음으로 내게 ‘잘 사냐’고 물은 것이?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옆 침대에 폐암으로 고생하고 가셨던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가래 뽑는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힘들던지. 자식들이 교대하며 간호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심코든 일부러든 내뱉는 말들, 가래를 뽑는 거친 손길이 왠지 불쾌했다. 할아버지가 의식이 좀 돌아올 만하면 서로들 경계하며 변호산지 뭔지 전문가들 대동해 우르르 우르르 왔다 갔다 했더랬다. 들어 보면 건물도 많고 자식 같은 사람도 많고 부유한 것 같았는데 마지막 모습에는 도무지 사랑 아니, 작은 정이라도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유산, 유산이 뭐길래.      


    ‘막대한 유산’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찬찬히 읽어 본다.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답을 내줄 수 있는 고전이 아닌가 말이다. 도대체 ‘위대한 유산’이 뭔지, 디킨스는 뭐라고 생각했는지 알고 싶었다. 모든 명작이 그렇듯 읽는 내내 영화 장면보다 생생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책을 펼쳐 든 목적이 뭐였는지도 잊을 정도로 재밌다. 책은 덮었는데 역시 모든 명작이 그렇듯이 ‘이것이 위대한 유산’이라는 설명은 없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뒤죽박죽 한 느낌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늘 잠이 부족한 남편은 연신 하품하다 이불을 돌돌 말아 머리끝까지 덮고 3분이면 꿈나라로 갈 것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위대한 유산을 읽었는데….”

    “응, 그래서 위대한 유산이 뭐래?”

    “안 잤어?”

    “금방 잘 거야.”

    “자기 전에 잠깐 말해 봐. 위대한 유산은 뭐라고 생각해?”

    “나 자야 되는데…. 가족, 사랑, 생명…, 그런 거?”

    “뭐, 성경책에서처럼 그런 거 중에 어느 게 젤 중하다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들어 볼래? 마지막 장   면이야 … 아직 안 자는 거지?”

    “… 응.”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났던 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그리고 손을 잡고 그 폐허의 장소에서 걸어 나갔다, 그래. 그 순간 안개가 걷히고 있었대. 달빛도 고요하고.”

    “해피엔딩이네. 결국, ‘사랑’?”

    “나도 그렇게 끝나나 보다 했거든. 근대 마지막 문장이 참, 사람 아리송하게 하는 거 있지.”

    “뭐라 그러는데.”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나는 그녀와의 또 다른 이별의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 그만, 자자.”    

 

    쉽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소설 『위대한 유산』이 우연히 얻은 ‘막대한 유산’에 대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유’라는 면에서 보면 그가 받은 ‘막대한 유산’도 그가 사랑한 에스텔라도 모두 실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지 못했을 때나, 가졌을 때나, 또 잃었을 때나 모두 시련의 연속이었다. 

   『인비저블 우먼』(2013)이라는 영화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찰스디킨스와 넬리 터넌이 나눈 비밀스러운 사랑에서 찾아낸다. 결말에 이르며 감정이 고조된 여주인공은 교회 묘지를 찾아 고해하듯 신부에게 자신과 디킨스의 관계를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이 먼저 절 떠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가 먼저 죽게 될 거라는 걸요. (…)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린 혼자라는 걸요.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어도 우린 혼자예요. 그 사람이 맞았어요.  

   

    『위대한 유산』이 시작하는 장면은 주인공 핍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명의 형제가 모두 묻혀 있는 묘지였다.     

 

 ‘내가 쐐기풀로 뒤덮인 쓸쓸한 이 장소가 교회 묘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그리고 이 모든 게 무서워져서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며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 핍이라는 것을 내가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주인공 핍에겐 혈육도, 막대한 재산도, 신사의 삶도, 여인과의 만남도 모두 행복한 삶에서 비켜 있다. 확실한 건 시련과 같은 이 모든 일 들을 거쳐 그는 ‘웅크린 채 벌벌 떨며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존재’에서,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폐허의 장소에서 걸어 나가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평화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이들은 조와 비디로, 이들은 핍이 막대한 유산을 받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 있었다.      

    엄마의 기록은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2년 정도의 시간 동안 이어진다.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다’(왜 부끄러워야 할까) 고도 썼다. ‘밤잠을 이룰 수 없는 외롭고 쓸쓸한 세상’이라고도 한다. 어느 말도 필요 없이 그저 ‘보고 싶다’로 채운 쪽도 있었다. 눈물이 끝날 것 같지 않게 흐르던 날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에 보이는 으스스한 산을 자세히 보니 갖가지 나무들에 일대 소동이 났다’고 한다. 그러다 저런 식물들도 다시 찾아오는데 사람은 한 번 가면 올 꿈도 못 꾼다고 운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 울어서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그래도 애들을 위해서 건강해야겠다고 헬스도 하고 수영도 하고 보험도 들고 열심히 영성학교에 나간다고 쓴다. ‘비가 꽤 많이 오고 있다’는 짧은 문장으로 무심히 기록은 끝이 난다. 다시 시간은 흐르고 다시 여름이 온 거다.      

    영화 『인비저블 우먼』은 이렇게 끝난다. 찰스 디킨스가 넬리 터넌을 처음 만나던 순간에 연극배우인 그녀가 읊던 대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비통한 이야기입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거부당한 사랑과 내일을 살기 위해 회복된 사랑
침묵이 무거운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기억하세요. 사랑하고 받는 게 인생이며
사랑 없이 우린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나도 엄마가 있어.’      


   그렇게 엄마, 내게도 엄마가 있어요. ‘침묵이 무거운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쓰고 남깁니다. 나는 ‘엄마가 있기에’ 사랑합니다. 엄마가 있어서 나도 살아갈 힘을 얻어요. 엄마 목소리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또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할 그림자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담가 준 하얀 물김치의 맛처럼, ‘행복’해요, 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