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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09. 2023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다시는 절대로 물어볼 수 없을 이야기들을

    장미가 붉고 햇살이 덥다. 푸른 물줄기, 아이들 웃음소리가 싱그럽게 울리고,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이 담긴, 작가 이수지의 그림책 『여름이 온다』를 할머니를 뵈러 어버이날 찾아온 조카들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건넸다. 루시드 폴의 노래가 풀어놓는 『물이 되는 꿈』도 서로 돌려보라며 들려 보냈다. 나는 뭉클하고 좋아서 주었다 만, 애들은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뿐 시큰둥하다. 이런 아이들의 반응, 재밌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정보라서, 책을 읽지 않고서도 찬사를 보내거나 비판하는 게 가능하고, 열이면 아홉은 아는 만큼밖에는, 들은 만큼밖에는 좋아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은 때가 되면 싫든지 좋든지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설레는 일이랄까. 『여름이 온다』에 아이들처럼, 파란 나무와 하늘이 있는 마당에서 신나게 물 뿌리면서 놀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서울에서 태어나, 오전 오후 반 수업하던 국민학교를 나와, 한 반에 육칠십 명씩인 중고등학교를 마친 내게도, 아파트가 아니라, 고추와 토마토를 기르던 마당이 있고, 썩은 나무를 갈아 주어야 하는 마루가 있던, 단독주택의 추억이 있다. 한여름이면 마당에 커다란 고무 대야를 놓고 물을 받아 놀았다. 놀다 지치면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잤고 소설에서처럼, 드라마에서처럼,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쓸어 닦으며 부채를 부쳐 주셨다. 할머니가 붉은 토마토를 마당에서 따오시고 수박을 쪼개면, 엄마는 사 온 얼음으로 화채를 해줬다. 그런 기억이 내게도 있었다. 아빠랑 서해에 가 수영을 배우다 큰일 날 뻔한 이후로 그리고, 대학교 1학년까지 괴롭히던 피부병 때문에, 이렇게 신나게 물놀이를 해본 적은 더 없었을 거다. 대학 2학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거짓말처럼 피부병이 사라져, 다시 바다 물속에 첨벙 들어가 몸을 휘감는 파도를 껑충껑충 타며 놀 수 있게 되었다. 별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까만 밤, 방 불을 끄자 보이던 별빛 같달까. 흔하디 흔한 이야기 하나일 뿐인데, 내게도 있다는 게 신기하고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한 건 왤까.      

    할머니와 나는 개띠다. 육십갑자 한 바퀴 돌 만큼 차이다(우리 아들과 시어머니 나이 차). 내가 결혼할 때 할머니는 팔십팔 세셨다. 그때 연세가 그렇게나 되셨다니, 그러고 2년도 안 돼 돌아가신 거구나. 할머니가 아프신 주기는 내 시험 때와 늘 겹쳤다. 고3 때 할머니는 대장암 수술로 입원해 계셨다. 대학원 시험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험 날이던가, 그 전날이던가 새벽,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머리맡에 할머니가 오셔서 내 이마를 쓰다듬어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계셨다. 그리고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니 ○○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창문 밖 멀리 눈길 한 번 주고 포르르 눈 감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감자를 손으로 문질러 닦을 때면 할머니가 이마를 쓸어주시던 그 느낌이 떠오르곤 한다. 그와 함께 성탄 전날 밤, 우리 삼 남매를 재우려고 할머니가 해주시던 개미, 메뚜기, 두루미에 관한 옛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개미, 메뚜기, 두루미는 지금과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심지어 셋이 사이좋은 친구이기까지 했다. 어느 날 세 녀석이 개울가로 놀러 갔다. 개울가엔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물고기를 낚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늦둥이 아들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아들이 너무 예뻐서, 일하고 돌아오는 밤이면 아들과 노는 게 사는 낙이었다. 할아버지가 “저기 엄마 한 대 톡 치고 오너라.”하면 아들이 할머니에게 가, 톡 치고 오고, 할머니가 “저기 아부지 한 대 톡 치고 오너라.”하면 할아버지에게 가, 톡 치고 오고,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는 이 놀이가 버릇되어 자라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퍽하고 치는데, 다 큰 아들 녀석의 손은 너무 매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 견뎌 도망 나왔다. 낚시한 것으로 국을 끓이려는데 이분들이 눈이 너무 안 좋은 것이다. 그래 똥 하고 된장하고 구분을 못 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똥을 국에 풀어 버렸다. 이 모습을 본 개미, 메뚜기, 두루미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개미는 배꼽을 잡고 너무 웃는 바람에 허리가 그렇게 가늘어졌고, 두루미는 부리를 잡고 웃어대는 통에 입이 뾰족해졌다. 이때 웃느라 발을 삐끗한 메뚜기가 튀어 오른 물고기에 먹혔는데 이 물고기가 할아버지 낚싯대에 걸렸다. 물고기 배를 가르자 그 뱃속에서 튀어나온 메뚜기가 하도 머쓱해 이마를 쓸어대는 바람에 메뚜기 이마가 그렇게 벗어진 거다. 


    웃으시며 메뚜기가 이마를 쓰는 모습을 흉내 내던 할머니의 손짓이 너무 재밌어서 우리 셋은 깔깔 웃다가 아빠, 엄마한테 얼른 자라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때리던 버릇없는 아들이 궁금해서 할머니께 조잘조잘 묻기 바빴다.      


    엄마, 아부지가 계시지 않으니 아들은 너무 배가 고팠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아들은 산속 집에서 나와 마을로 가 서성거렸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너무 졸립기도 하고 해서 이 아들이 뭘 했는지 꿈결이 되어 버린다. 원래 숯쟁이 아들이었다는 거 같기도 하고, 소가 될 정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붕을 뛰어넘어 다닐 정도로 장사였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어느 부잣집 담벼락에서 똥을 누는데, 담 너머에 있던 부자가 화가 나 달려와 보니, 그놈이 먹은 것도 없는데 똥은 푸짐하게 잘 눈다고 뭐가 돼도 될 놈이라 했다나….    

  

    그렇게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머리맡에 소꿉놀이 세트, 병원 놀이 세트, 과자 선물 세트 그런 것들이 놓여있곤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었다. 이 개미, 메뚜기 이야기 끝이 무덤을 파던 구미호로 끝나기도 하고, 구미호로 시작된 이야기가 토끼와 호랑이 이야기로 끝나기도 한다. 나중에 엄마한테,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얘기를 아시는 거냐 물으니, 그날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나 동네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 아는 얘기 섞어서 그때그때 하시는 걸 거라고 했다. 이 얘기 끝에 엄마가 그러신다.     

 

    “요즘은 못 참고 자꾸 에어컨을 켜네. 더우면 이제 머리가 아파. 옛적 너희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네. 왜 그 방에 선풍기 한 대 못 놓아주었나 싶고 죄송하기만 하네. 말은 못 하고 얼마나 더우셨을까. 없어도 마음 크게 먹으면 사드렸을 텐데, 내가 너무 몰랐어. 이런저런 생각에, 많이 미안하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던 분이었는데, 철없던 그 아들 어찌 되었는지 물었던 적 말고는 할머니께 다른 걸 더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얘기, 하고 싶은 얘기 많으셨을 텐데. 이젠 아무리 생각해 맞춰봐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을 텐데. 다시는 절대로 물어볼 수 없을 이야기들을 나는 이제 와 새삼 궁금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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