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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24. 2023

꽃, 별, 그리고 나의 멜랑콜리

살아지는 것, 사라지는 것

    그늘 하나 없이 햇살 더운 바람에 너울거리는 커다란 연꽃 그림을 끝내고 ‘여름의 끝자락’이라 제목을 붙였다. 돌아보니 산속 진달래가 팔락이고, 무수하게 달린 목련이 춤추고, 해바라기가 방긋 웃고 있는 꽃밭이다. 핸드폰이 꽃으로 가득 차면 나이 든 거라는데 핸드폰이 아니라 방을 꽃 그림으로 채우고 있다. 꽃이 싫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부자 된다고 해바라기 그림을 그렇게 많이들 걸어놓는다. 도연명은 국화를 좋아했다지. 많은 사람이 모란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진흙 속에서도 고고한 연꽃을 사랑한다는 주돈이 글도 있다. 같이 그림을 배우던 성당 자매님들도 꽃을 참 열심히 그렸더랬다.

    젊을 땐 꽃이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가 꽃이니까. 어릴 적 나도 꽃이 그렇게 좋진 않았다. 장미는 가시에 찔릴까 무서웠고 그 냄새가 꼭 오줌 같기도 해서 도대체 장미 향이 왜 좋다는 건지 몰랐다. 예쁜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나도 꽃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꽃을 좋아하고 잘 가꾸는 사람들 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 세상일이란 게 좋은 거 아니면 나쁜 건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좋으면 어느 정도는 나쁘기도 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늘 한편으로 외로웠다. 파리지옥을 기르던 옆집 친구에게 놀러 가는 게 더 재밌었다. 

    우리 시어머니도 꽃을 잘 가꾸신다.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부지런하고 유쾌한 분이 아닐까. 집집 화분과 거리, 공원, 산책로의 화단을 꿰뚫고 계셨다. 어느 날 하루는 아파트 현관 옆 공터에 사람만 한 철쭉나무를 열심히 옮겨 심고 계시는 거다. 분홍 꽃이 조화롭게 가득한 나무였다. 이유인즉, 이렇게 고운 꽃이 외진 곳에 피어 많은 사람이 볼 수가 없다는 것. 어머님의 뜻과는 달리 자리를 옮긴 꽃은 곧 시들어 버렸다. 내가 좀 예민한 사람일까? 나는 문득 그 나무가 내가 아닐까 싶어지는 거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뿌리째 뽑혀 낯선 땅에 발을 묻고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싸인 것이. 나무가 말라죽자 내 머릿속 등불도 딸깍하고 꺼졌다. 끝없이 필 것만 같던 풍로초도, 아빠가 남겨주신 군자란도 잿빛 세월에 모두 묻혔다. 꽃이라는 생명체는 내게 그렇게 헛되고 헛된 기억이었다. 

    

    ‘먼지가 될 것이다’. 예상 밖이다. 자신이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아니, 어떻게 될 것 같은가를 묻는 유튜브 질문에 대한 답으로, 천국으로 간다, 지옥에 간다, 모두 아니고, 환생도 아니고, ‘먼지가 될 것이다’를 선택한 사람이 반을 넘는다. 세상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 아니었나. 천국에 갈 거다, 아니면 환생하리라, 생각할 줄 알았는데,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니, 놀랄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먼지’라고 하는 이야기를 EBS의 우주 대기획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가지고는 있지만 죽으면 당연히 먼지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얼마나 많이 답을 했는지, 연령대는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나와 비슷한 연배 이상의 사람들이 응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나이 든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하는 이런 조사에 클릭했다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내게 갱년기가 왔다. 요리조리 세보아도 산 날이 살날보다 많다. 마음 같아선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셋 아가씨인 것만 같은데, 나는 말이 끝도 없는 아줌마가 되었다. 윤성희의 단편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거짓말 같은 일들이 역사가 되어가는 중년이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아니, 너무 평범하구나, 싶다. 낯선 것은 맞는데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한 번 만나지 않았나 싶은 사람 얼굴들이 꽤 많다.  

    

   아무래도 거짓말이지, 싶은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처럼 누운 사람을, 이 세상을 막 떠나가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본 일이다. 죽음이란 건 사람에게 당연한 건데, 그것이 참 별일인 거다. 삶의 끝이 이렇듯 허무한데 기를 쓰고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보잘것없고 하찮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후로 한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두운 밤, 단말마의 그 정적과 고통이 떠오르면, 안경을 급히 챙겨 쓰고 물 한잔을 마신 뒤 심호흡을 한다. 그러면 온몸의 핏줄이 울컥 떨려 온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하는 검은 담즙이 내 몸속에 아마 함께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나의 멜랑콜리라 하자…. 삶이 모두 빠져나간 뒤 아빠의 혈관에 남아 있던 그것이었을까. 나는 살아 있어. 죽음과 함께 살고 있어. 그러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생각해 보니, 아빠가 가르쳐 주고 가신 게 있다. 아빠는 여덟 살 때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다. 병풍 뒤에 누이고 곡들을 해줬는데 예수님처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보는, 빛으로 가득한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고 했다. 저 멀리 뭔가 재밌는 게 있는 것 같아서 얼른 가 보려는데 어른들이 부르는 소리가 나더라고 했다. 그래도 너무 궁금해서 더 가고 싶었는데 우는 소리에 돌아와 눈을 떴다고. 그렇게 다시 얻은 삶, 칠십이 면 충분하지, 죽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난 알아, 그러셨다.     


    어느 해인가 구월이었다. 통통한 잣을 주울 수 있던 가평 유명산으로 캠핑을 갔다. 청량한 밤, 굽이굽이 산을 돌아 중미산 천문대를 찾았다. 평생에 처음 가 본 천문대인데 날씨까지 너무 좋아서 쏟아지는 별빛이 뭉클했다. 망원경으로 토성과 목성도 볼 수 있었다. 조금 큰 점 같은 토성이었지만 그림, 사진에서 보던 그 고리까지 보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별빛은 모두 과거의 것이라 했다. 몇만 년, 몇십 만 년은 보통이라고. 지금 그 별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죽어서 먼지로 머무는 곳이 저런 곳이라니 허망한 것만은 아니야. 아마도 삶이란 별빛 같은 것일까.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 문득 사라진다 해도, 무한의 시간 지나 어딘가에선 볼 수 있는 것. 살아지는 것, 사라지는 것….     

    그 별빛을 바라보듯 나는 꽃을 그린다. 화분이나 화병의 것이 아니라 산에 핀, 밤에 핀,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핀 꽃을. 지금은 사라진 그 꽃을 그리며 별빛을 보듯 기억한다. 나는 비로소 이별의 슬픔을 바라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만을 애도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바라던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애도해야 합니다.’      


  이 구절 때문에 엄마와 함께 『엄마와 딸의 심리학』이란 책을 읽었다. 김영하는 그의 산문집 『말하다』에서 10살, 연탄가스 중독 사건 이후로, 유년 시절의 추억이 없어졌다고 하던데 뭐, 연탄가스 마시는 일 없어도, 보통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없어서 바라는 법도 몰랐던 일들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만남과 동시에 불현듯 이별하게 된 외할머니,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살아 계시지만 추억이 없는 외할머니, 모두 애달프다.  

    

   지금 냉장고엔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엄마가 해준 멸치볶음, 오이지무침, 콩장이 들어 있다. 시어머니 드리라고 오이짠지도 한 통 담아주셨다. 엄마가 있으니 할 수 있는 거라면서. 엄마는 멀리 있는 또 다른 딸 걱정에 혼자서도 비행기 타고 먼 미국 땅까지 간다. 아빠 손잡고 같이 다니고 싶어 아빠 은퇴만 기다렸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엄마와 딸로, 서로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채워 갈 것이다. 엄마, 힘들지만 않게 하시길. 최대한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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