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은 빨갱이가 아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손녀의 삶에
이렇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클라우디아 하르만,『엄마와 딸의 심리학』)
또 또, 이놈의 집구석, 제일 먼 데가 어디야, 그러면서 기차에 올랐다. 갈아타지 않고 제일 멀리 갈 수 있는 곳, 여수로. 핸드폰은 꺼 놓고 달랑 지갑 하나 들고 나는 집을 나왔다. 여수가 고향도 아니고 아무 인연도 없는데, 나는 무슨 일만 나면 여수로 내빼곤 했다. 그날은 더더욱 여수여야 했다. 돌산 향일암에서 지는 해든 뜨는 해든 봐야지 살 것 같았다. 아버진 뭐 수구 꼴통이야, 그런 말씀을 하시냐, 했다가, 늘 편들어주던 남편이, 아버질 꼴통이라고 하는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 나무라는 통에, 정신이 나갔었다. 어떻게 시아버지께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놀랐다. 오랜만에 시아버지의 동네 고향 친구분이 마실들을 오셨다. 집이 크질 않아서 부엌에서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나 보다. 내가 “오매!”라고 했다는 거다. 시아버지는, 친구분들이 전라도 며느리 얻었다고 뭐라 하더라, 하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에 무섭기도 하고,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왠지 기분이 나빠서, 아버지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하고, 남편한테 하소연하려다 불쑥 튀어나온 말이 “꼴통”이었다. 다음 날 새벽, 역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국밥을 나눠 먹고 집에 들어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조용히, 꼭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한참을 지나 엄마와 대화 끝에 나의 사적인 여수 반란 사건을 얘기하게 되었다. 엄마는, 어머, 네가 왜 전라도 며느리니, 아빠도 충북 영동 사람이고, 왜 너희 아빠 늘 족보 보셨잖니, 포은 정몽주 자손이라고 안 하시든, 너 서울에서 태어났잖아, 전라도에서 산 적도 없는 앤데 무슨 전라도 며느리래, 하고 한숨을 푹 뱉는다. 엄마한테는 영원히 비밀이었어야 했는데 괜한 말을 했다 후회되었다. 엄마는 풀이 죽어서, 엄마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그러시는 거라니, 하신다. 엄마도 사투리를 안 쓰는데 그 말은 어디서 듣고 쓴 거니, 어려서 외가에 가면 그분들이 서울 사셨어도 사투리가 심하셨잖아, 그랬구나, 그러고선 다시 한숨 푹.
시댁이나 친정이나 하나같이 말수가 적다. 쓸데없다 생각되는 말들은 안 한다. 큰아버지가 군산 계신다고, 그래서 전라도로 알고 계신 건가 봐, 엄마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다. 아닌데, 원래 네 시댁처럼 충청도분인데, 할아버지가 함경도에 일 있어 올라가셨다가 전쟁에 무작정 기차 타고 내려왔고, 그 기차가 선 곳이 군산이셨다는 것 같은데, 알잖니, 아빠 혼자 먼저 서울로 올라오신 거. 엄마, 엄마, 잠깐만. 내가 서울 며느리든 전라도 며느리든 무슨 상관이에요. 도대체, 왜, 엄마가 안절부절못하는지요.
엄마의 고향은 전라도 해남이다. 일꾼들에게 낼 음식 하느라 분주한 부엌 설강 옆 기둥에 매달아 뽈뽈 기어오르는 낙지 발을 탁하고 잘라 장독대 된장에 푹 찍어 먹곤 했다는 기억이 엄마에게 남아 있다. 그 지방 억양이 특색 있으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몇 달 전 아흔 넘은 연세에 돌아가셨다. 말년에 치매가 있으셨다고 했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는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 치매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당장 큰 문제는 없지만 치매 유전자라는 게 있으니 인지 능력 유지에 신경 쓰라는 결과가 나왔다. 나는 엄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를 늦어서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했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맑은 정신에 바지런하셨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으니 좋았다. 그럼, 이 치매 유전자는 외할아버지 쪽에서 찾아야 하는 건가. 엄마를 낳아주신 아버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외할아버지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햇살이 카페테리아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나는 아르굴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함께 일했던 한 신부님께 기도를 부탁하고 있었다. 엄마 나이 육십에 외할머니를 찾으니, 엄마를 길러주신 부모님들은 외할아버지의 기일은 이제부터 엄마 차지라 하셨다. 엄마와 함께 동생을 보러 가 있던 참에 신부님을 뵙게 되었고, 말씀을 좀 드려보라셔서 부탁을 드리긴 하는데, 엄마의 간략한 설명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들은 말들을 그저 앵무새처럼 띄엄띄엄 전할 뿐이었다. 그러고서 또 몇 년이 흘렀다.
“내가 뿍뿍 길 적에 잡혀가셨대. 난 잘 몰라. 할아버지랑 식구들이 그 얘기를 안 했었고, 나도 또 원래 어려서부터 순둥이어가지고, 하지 말라 그러는 건 절대로 안 했대. 원래 물어보고 그런 걸 안 하고, 말이 없었대, 지금은 내가 수다쟁이(?)지만. 그래 어려서 사진을 보면 웃는 사진이 없어. 뚱하고 무표정인 거야. 그랬어. 그거에 대한 걸 일부러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라. 한참 커서 어른들 하시는 얘기 쪼끔쪼끔 들은 것들 뿐이지.”
엄마의 기억은 엄마 말대로 뿔뿔이 흩어져 떨어진, 군데군데 없어진 직소 퍼즐 조각 같았다. 엄마는 그 뚱하고 무표정인 사진조차도 물난리 났을 때 전부 잃어버렸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것은 외증조할아버지가 다 태워 버리셔서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전쟁이 터졌다. 학생이던 외할아버지 삼 형제는 숨어 있었다. 두 작은할아버지는 겁이 많고 무섭고 하니 꼼짝 안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친구들이 부르고 그래, 잠시 나갔다. 배가 고프기도 해서 누 집 계란을 훔쳐 먹었다. 시골에서는 밀이삭이나 계란 하나 정도 먹어도 가족이나 다름없이 사는 사람들이라 뭐라 안 하는데, 주인을 잘못 만나서 경찰에 잡혀갔다. 인민군에 안 끌려가려고 숨었더니 경찰이 더 무서웠다고 어른들이 그랬다. 할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엄마는 몇 해를 넘겨, 작은할아버지에게로 호적을 올려 출생신고가 되었다.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는 그래서, 그 전쟁 난리 통에서 살짝 비켜 있다.
‘전쟁은 많은 남성을 죽였습니다. … 당시 미망인 즉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성’이 무려 100여만 명에 달합니다. 이들의 처지는 ‘불쌍하다’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다만 그녀들의 기억 정도만이 연구를 통해 복원되고 있을 뿐입니다. ‘군경 미망인’, 즉 남편이 한국전쟁 당시 남한 편이었을 경우 미망인들의 기억은 대부분 ‘자랑스러움’입니다. 고통을 이겨낸 여인의 긍지가 그들의 진술 속에 오롯이 담겨 있어요. 하지만 ‘피학살자 미망인’, 즉 어떠한 이유에서건 남한 체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남편의 아내는 다른 방식으로 당시를 기억합니다.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기억나지 않는다’, ‘잊어버렸다’,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식이니까요. 길 위에서 출산을 하기도 했고, 시댁 식구들에게 버림받기도 했으며, 생활고를 못 이겨 자식들과 동반자살까지 시도하기도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억과 지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입담 좋게 역사를 설명해 주는 심용환이 쓴 『단박에 한국사(현대편)』237쪽 에 있는 글이다. 엄마가 해 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이해해 보려고 1950년대 생활문화사를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빌려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나와 무관했던 단어, ‘피학살자 미망인’. 한참 글을 써가면서도 이 단어가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 중 하나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엄마는 외할머니를 만났을 때, 자식이라고 앞에 나설 수 없어도, 할머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다행이다’ 했던 거였구나. 어머니가 한동네에서 아이가 뛰어노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는 척하지 못했던 거였구나. 그리고 끝까지 말하지 못했던 거였구나. 두려움 속에서 어떡하든 살려낸 거고 부디 살아있기만을 희망할 뿐인 기다림이 있었구나. 하지만 왜? 인민군이 되지 않으려 했을 뿐인데, 잘못이라곤 계란 하나를 서리해 먹은 것뿐인데, 사람이 어디로 간 줄도 모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그 아내는 아이와 살지 못하고, 그 아이는 낳아주신 엄마와 아빠의 보살핌을 모른 채 살았어야 했을까?
엄마는 길러주신 아버지(실은 작은 아버지)의 염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했다. 옆에 서 있던 이모가 말했다고 한다. “언니, 언니만 힘들었던 건 아냐. 우리 모두 힘들었어.” 늘 큰 소리로 혼을 내시던 전라도 할머니, 치매에 걸려 울 엄마를 못 알아보시는, 십 년 전까지 나의 외할머니로 알던 여인. 세상 냉정하시던 그 할머니를 떠올리면 함께 들려오는 소리, “오매!” “오매, 징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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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빨갱이, 운전이 아주 지 맘대로 네!”
“엄마, 빨갱이가 뭐야,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아니, 저 빨간 차 말이야. 아무렇게나 빨갱이, 빨갱이들 하는데 뭐 어때.”
“엄마도 빨간 차잖아. 그렇게 따지면 엄마도 빨갱이야.”
어느 역사학자는 말한다, ‘자신의 과거 무의식적인 행동 속에는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한국인들이 갖는 본능적인 공포감과 순응주의가 철저히 내면화되어 있다’(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고. 아들 말이 옳다. 빨강은 빨갱이가 아니다. 대한민국 표준국어사전에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고 딱히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말도 아니다. 공산주의자 아니라도 그렇게 지목당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는, 혐오와 폭력, 광기의 단어다. 요즘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데, 여전히 이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해도 되는지 스스로 검열하고 있다. 남편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남편은, 좀 예민한 문제 아니야(정치적인 것 아니냐고), 한다. 아니,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얘기 좀 하면 안 되나 하고 서운한 맘이 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내가 뭐라고 그럴 수 있을까. 국가와 경찰이 평범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항의라도 해보고 싶지만, 아니, 항의하는 게 아니다. 할 수도 없다.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 사실이 무엇인지 알려야 알 수 없는, 너무 오래된 사건인걸.
나는 다만 말하고 싶다. 개인의 삶은 역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들어서, 배워서 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해 보라고, 이런 걸 배운 기억이 있느냐고. 역사를 안 순간, 그런 일들이 분명 벌어졌다는 사실을 안 순간, 전라도 며느리라 한 충청도 시아버지를 원망하던 마음이,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일상이 다시 계속되곤 하는 이유를, 묻지도 못한 엄마의 어린 시절이, 그저 미안하기만 한 엄마의 엄마 말이, 배운 사람들 하는 말인데 믿어야지, 안 그러냐 하는 사람들과 공부를 그리해서 뭐 하느냐는 어르신들의 핀잔도, 광장에서 미국 국기와 태극기를 미친 듯 흔들어 대는 사람들까지 비로소 이해되더라고. 안개가 걷히는 듯한 이 기분을 아는 사람은 아마, 나 말고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차마,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할 수가 없다. 싸이와 방탄소년단 슈가가 서부영화 같은 배경에서 춤을 추며 “Do what you want(너 하고 싶은 걸 해)!” “Say what you want(네가 원하는 걸 말해)!”라 외치는 시대라 해도. 나는 그저, 식당에 가면 늘, 말소리 크다고 줄이라는 엄마에게만이라도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이제 알았다고, 시대의 상처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걸 안다고, 누가 뭐라든 우린 당당하니 오늘부터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