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저기 저 사람이 박인비 남편이잖아.”
“응, ‘어쩌다 사장’에 나온 착한 그 남편?”
“맞아. 박인비는 남편하고 만나서 더 잘 된 경우야.”
“발레리나 강수진도 남편 덕에 재기할 수 있었다던데.”
8년을 연애하고 25년 넘게 같이 살고 있는 사람. 청춘을 함께 하고 같이 늙어가고 있는 내 남편. 우리는 서로 참 바쁘게 살았다. 그는 기계를 다루는 이공계, 나는 인문계. 서로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서로의 이해와 관심이 만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동문이고 같은 동아리 선후배였기에 공유 화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 사는 게 그렇듯, 부모님 모시고 아이 키우다 보니 대화 시간이며 대인 관계며 공유 시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사라져 간다. 이렇게 남편을 보지 못하고 같이 얘기할 시간이 없다는 건 내겐 거울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에게 나도 그런 거울 같은 존재였으면.
박인비는 골프 선수다. 박인비와 그녀의 남편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TV에서 중계하는 골프 경기. 남편이 지금의 직장으로 옮기면서 반강제로 시작한 스포츠가 골프다. 시작은 반강제였지만 지금은 내심 좋아한다. 그가 대놓고 좋아하지 못하고 내심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취미로 만난 사람이라서, 한 사람이 좋아하면 웬만하면 같이 좋아하게 되고, 같이 즐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 골프 연습장을 따라가던 날,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간 나는, 온몸에 골프용품을 장착하고 연습하는 다른 여성들을 보았다. 짙은 화장에 딱 붙는 티셔츠, 미니 스커트. 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서 놀랐고, 그런 옷을 입을 수 없는 내 몸이 남편에게 미안해서 짜증을 냈다. 나는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는데,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퍼팅을 해보자는 둥, 이게 아이언이라는 둥, 강한 코어와 부드러운 회전이 중요하다는 둥, 신이 나 있다. 집에서도 그의 골프 사랑은 계속되었다. 진짜 골프가 재밌어서 더 잘 쳐보려고 보는 건지, 선수들의 튼튼한 허벅지, 날씬한 허리, 단단한 팔, 뽕브라 때문인지 봉긋한 가슴, 뭐 그런 걸 보는 건지 질투가 생겼다. 저 사람 자세 좀 봐봐라, 좋아 보이지 않냐, 내 자세는 비교해서 어떤 것 같으냐, 질문이 많은 걸로 보아, 여자들 보려고 골프 경기를 보는 건 아닌 것 같긴 하다. 쭉 뻗은 남자 골프 선수 몸이 그렇게 멋있다고 해서 관심도 없는 경기를 두 시간씩 틈만 나면 볼 수는 없으니까.
골프장을 보면 또 그게 그렇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골프 경기 즐기려고 저렇게 넓고 아름다운 곳에 잔디를 덮고 울긋불긋 꽃을 심고 좋은 경치를 소독약을 쳐서 관리하다니…. 어쨌든 남편은 그런 골프가 좋고, 골프에 대한 내 생각을 아니까 대놓고 좋아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내심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의 질투심은 여기서도 피어난다. 마치 아이가 자라 품을 떠나서 모르는 곳에 가 놀다 오더라도 그러려니 해야 하듯이 남편의 독립된 취미생활도 받아들여야 한다.
남편의 귀가 시간은 늘 늦다. 그래도 얼굴 좀 보고 살겠다고 어쩔 수 없이 밤늦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졸며, 보며, 같이 이야기 나누다 자는데, 그 와중에 본 프로그램이 ‘어쩌다 사장’이었다. 나는 조인성과 차태현 때문에, 그는 박인비와 그의 남편이 출연해서 같이 보게 된 우연한 시간이었다.
“이리 좀 와봐, 박인비가 남편하고 같이 경기하고 있어.”
나도 참 눈치 없지. 골프 얘기를 하고 싶었을 건데 골프에는 도무지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나는 나대로 밤에 티브이 보며 조느라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2년인가 3년 전에 ‘마르셀 뒤샹’ 전에 간 적 있었잖아.”
“뒤샹? 뒤샹…, 어디서 들어봤는데…. 맞아, 경복궁 옆에 옛 일제 강점기 때 건물, 현대미술관에서.”
“뒤샹이 사서였다잖아….”
“나는 ‘나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마르셀 뒤샹의 1955년 7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제임스 존슨 스위니가 진행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전 도록, 2018.)
역시 절대 시간 부족. 남편은 무엇이든 시간이 정해지면 경주마가 된다. 다른 건 금세 컷!
“맞아 … 아, 아들아! 우리 머리 깎을 시간 다 됐어. 늦는다고. 서둘러!”
“응, 알고 있어.”
샤워하는 물소리 속에 묻힌 무심한 대답 소리.
일상의 시간이 돌아가는 소리. 빨래 걸이에서 옷들을 들쳐 보며 외출복을 찾는 아들 모습, 서둘러 신을 신고 나서는 아빠. 나는 뒤샹에서 빠져나와 띵똥거리는 세탁기로 달려가서는 축축한 빨래를 꺼내 얼른 널고, 탁탁탁 신발을 신고 나가는 아들과 남편에게 도레미파 ‘솔’ 높이로 머리 예쁘게 깎고 오라고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