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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14. 2023

폴 세잔처럼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과 인연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좀 잘 부르는 사람이면 좋겠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간신히 아이를 성당 주일학교에 데리고 나갈 뿐이었다, 그때. 아이 미술교육을 위한 수업인 줄 알고 엄마들이 그림 강좌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건 아이를 시키는 게 아니라 엄마들이 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나무를 그려보라는 첫날 이후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선생님과 나, 그리고 한 엄마가 남았다. 진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수업이 없어질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느님은 짓궂달 밖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무언가를 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림이었다. 

    글이든 그림이든 발표할 기회가 있어야 는다. 논문도 쓰다 말고, 무슨 일이든 하다 말다 하던 나였다. 선생님은 자기 그림이 벽에 걸리는 걸 봐야 그림이란 게 뭔지를 안다고 했다. ○○협회에서 하는 미술대전에 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다, 말다, 시간이 흘렀다. 2021년 코로나가 한창이라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김에 한참을 묵혔던 미술 재료를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시회에 출품하는 것도 돈을 내고 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회 전단을 보니 3만 원만 더 내면 두 점을 낼 수 있고, 두 점을 내는 사람은 상도 준다고 한다. 두 점을 출품했다. 상을 준다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어떤 상을 받게 될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상이란 것이 최우수상, 우수상 같은 게 아니라 고흐, 렘브란트, 모네, 밀레 등등 화가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기준이 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어떤 그림이 어떤 화가의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될지가 궁금했다. 

    마스크 쓰고, 손소독제 바르고, 벽에 걸린 내 그림을 보러 전시회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딸에 사위, 손자까지 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가는 화가들 틈에서, 투박하기 그지없는 자기 그림을 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그렸으면서도 내 그림을 똑바로 보는 게 나는 참 힘들다(글도 마찬가지다). 주변이 조용해지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그림 밑에 작게 ‘세잔 상’이라고 붙어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긴 장마 끝 9월, 창밖으로 내다본 동네와 파랗게 열리던 하늘을 그린 그림이었다.

    세잔은 마티스와 피카소 등으로부터 존경받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다. 그가 그린 사과는 이브의 사과, 뉴튼의 사과와 더불어 세상을 바꾼 3대 사과라고 한다. 그림 배운 적 없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도 버거워하는 나인데, 내 그림에 그런 대단한 분의 이름이 붙어 있으니, 돈은 이런데 쓰는 거다, 싶다가도 좀 창피하다. 둘러보니 딱히 설명해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누가 봐도 도드라지는 서투름 때문일 거야….      


    세잔은 은행가였던 부자 아버지가 바라던 법률가가 되지 못하고, 대신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살롱전은 물론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유명세를 치른 낙선전에도 낙선할 만큼 인정받지 못해 늘 우울해했다고 한다. 2016년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보니,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와 「올랭피아」(1865)로 낙선전에 파란을 일으킨 에두아르 마네가 세잔의 그림(1866년 작 「화가 아버지의 초상」으로 보인다)을 보고 “조금 지저분한데”라며 폄하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를 조금 더 보노라면, 세잔 스스로 이렇게 토로하기도 한다. “섹스는 빨리 해치우면서 붓질은 느려터졌으니!” 세잔은 유명한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을 6년, 「대수욕도」의 경우 10년을 그렸다고 한다. 구연숙은 『두근두근 미술사』(네이버 블로그)에서 세잔의 국립 예술학교 낙방 사연을 전하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도 한다. “나는 단순한 인물이고 아둔한 눈을 가졌고, 두 번이나 보자르에 응시했지만 들어가지 못했지. 머리가 내 관심을 끌기에 그걸 너무 크게 그려 버렸거든.” 그도 그럴 것이 세잔의 데셍이나 수채화 속 사물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고, 유화 속 사과와 오렌지들은 또로록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세잔 드로잉』이라는 전시가 있었다. 코비드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관련 영상을 유튜브로 볼 수 있었다. 한 시간여 진행된 라이브 덕분에, 직접 본 것 아니어도, 뭔가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 도록이 있다는 걸 알고 동생 찬스를 썼다. 바빠서 들은 척도 안 할 줄 알았는데, 동생은 내 생일 선물로 전시 도록을 사서 보내 주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서울에 올라오셔서, 기특한 동생 두었다, 신나서 책 자랑을 했다. 그걸 들춰 보던 엄마가 그러신다. “네 그림이 더 나아 보이는데.” 나는 바로 대답한다. “내가 엄마 자식은 맞는데, 엄마, 세잔이에요, 세잔.” “아무려면 세잔 할아버지가 그렸대도 내 딸이 그린 게 더 좋지 뭘.” 엄마 말에 나는 한참을 웃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칭찬 솜씨가 좋았다.      


    나는 왜 내 그림이 ‘세잔 상’일까를 곰곰이 더 생각해 보았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파란 하늘을 보게 되어 기쁜 마음을 그렸다. 제목이 「장마 개인 날」인 건 ‘하늘이 해오리의 꿈처럼 푸르러 한 점 구름이 오늘 바다에 떨어지련만’하고 시작하는 이용악의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는 해바래기처럼 웃지 않어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하는 시구가 내 맘 같아서, 아이랑 함께 내다보던 창밖 풍경을 그리며 붙인 거다. 이렇듯 평범하기 그지없고 뭣도 모르는 데다 안온한 나의 마음과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자신이 그림에 대해 품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우직했던 세잔의 성정 사이에도 접점이 있을 수 있을까? 

    세룰리안 블루, 코발트 블루 같은 파랑색 아크릴 물감에, 가지고 있던 만년필 잉크 가운데 터키 블루를 섞어, 청량하고 맑은 하늘을 그려보려고 애썼다. 구름은 이웃집들 지붕 위로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하고, 그 사이로 퍼지는 햇빛과 푸르름이 저 멀리 보이는 북한산까지 이어지는 장관을 어떡하든 그려보고 싶었다. 삼각형의 붉은 흙색(번트 엄버, 번트 시에나) 지붕을 따라가다 보면 코발트색으로 이어지고, 청회색 사이로 햇빛이 비쳐든다. 저 멀리 푸르스름한 북한산이 누워 있다. 산 때문이었나?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과 연관지어 본다.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있다는 생트 빅투아르 산이 1,011m 이고 북한산이 835.6m라니 둘 다 꽤 높은 산인데, 석회산인 생트 빅투아르를 생각한 건 아니지만, 북한산자락 모양이 그 비슷하게 그려진 것도 같다. 구름 모양은 루브르 박물관에 거대하게 서 있는 나이키(승리의 여신)의 펼친 날개 같기도 하다(빅투아르는 불어로 빅토리, 승리라는 뜻이다). 주택과 빌라의 지붕을 정말 열심히 지었다. 그리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렇게 한 채 한 채 지으면서 북한산까지 가다 보면 너무 멀어서 어쩔 수 없이 지붕이나 창문은 색으로 그린 세모와 네모가 된다. 비슷하게 그려보려 애썼지만, 너무 힘들었다. 멀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던 집들을 몇 번의 붓 터치로 대강 때웠다는 느낌이 들어 풍경에 미안한 맘이 들기도 했다.

    1904년도에 그려진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았다. 세잔은 세상의 형태를 구, 원뿔, 원기둥 등으로 환원해서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태의 본질이었다고. 이를 구현하는 것은 그의 색이다. 그렇구나. 그림을 그리며 고민하던 것들을 세잔이 공들여 발견한 과정에 별생각 없이 이입해 보니, 다음엔 이렇게 해봐야지, 하는 의욕이 생긴다. 물론 의욕일 뿐 실현된다는 건 만무하지만 늘 그 과정에 내 것이 숨어 있다.     


    세잔을 공부하고 내 그림을 다시 보며 배운 것이 많다. 나는 풍경을 자주 그렸다. 주로 사진을 보고 그리게 된다. 솜씨도 없으면서 꼭 같이 그리려 애를 쓴 결과 엄마나 동생에게 “사진인 줄 알았어!”라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처음엔, 인터넷에 있는 멋진 사진을 그려보곤 했다. 그런데 같은 주제의 풍경 사진이라도 내가 찍은 사진을 그릴 때는 뭔가 다르다. 내가 찍은 사진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찍은 사진으로 그리면, 향기가 나기도 하고 바람 같은 것이 뺨으로, 머리카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며 때론 새소리가, 때론 물소리가, 때론 얼음이 쩍 녹는 소리,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리마저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내 목소리를 듣는다. 다 그린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궁금해진다. 그림을 보면서, 내가 그렸으니까, 그 냄새, 바람, 소리를 떠올린다지만 이 그림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나랑 같을 수 있을까? 

     물론 절대로 같을 수 없다. 그래서 잘하든 못하든 어떻든지, 창작을 하는 사람은 외로운가 보다. 엄청난 속도로 들끓는 열정을 무수히 쏟아도 이야기 들어 주는 단 한 사람 찾기 힘들었던 고흐의 고독은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다. 나는, “생각해야만 한다.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각도 해야 한다.”라면서 사물을 최대한 다양하게 바라보고 이를 한 곳에 조화롭고 안정적으로 모으는 방법을 연구하는 세잔의 우울(blues)엔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에서 「올랭피아」를 출품한 마네에게 손이 더러워 악수할 수 없다면서 그의 평을 피하는 듯하던 세잔이 무심한 척 귀를 쫑긋하고 있다가 ‘지저분하다’는 평에 한숨 쉬며 돌아서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그림을 남들 앞에 내놓아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것일지라도.

    ‘움직임이 세잔의 풍경화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진실임을 깨닫게 된다’고 로렌스라는 사람이 말했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따라가며 만난 세잔의 그림은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 빅투아르 산」(1885-1887)이라는 작품이다. 전영백이 『세잔의 사과』에서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빌어 소개하고 있는 이 그림에선 소나무 가지가 멀리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그리는 사람,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 바로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 순간, ‘관객으로서의 시선과 풍경의 장면이 분리된 상태가 아닌 상호 간의 공간적 소통으로 얽혀들어가’ ‘잡히지 않는 빛의 흔들림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세잔이 말했다고 한다, “흘러가는 세상의 한순간일지라도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따르면 ‘감각은 현상학적으로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오늘도 혼자 공부한다, 폴 세잔처럼. 물론 그처럼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는 역량도 그럴 목표도 없지만. 여름 끝자락 불던 후텁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 아래 지나간 시간 흔적처럼 꽃잎 그림자를 슬쩍 더해보기도 하고 4월, 흔들리는 목련 가지 위에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꽃을 올려놔 보기도 한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남편이 그림을 보고 이건 뭐냐고 물어 온다. 그 순간의 기쁨은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한 줄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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