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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 Aug 05. 2023

이젠 좀 아름답고 다정한 세상에 살고 싶어

더는 아니다 

    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바쁜 중에, 김경수의 드루킹 관련 판결에 대한 김어준의 생각을 들으며, 우원식과 홍문표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왜 이 일에 대하여 찬반 의견을 공평·공정하게 들어주어야만 하는지 잠시 불쾌해하다가, 이를 닦으며 홀연 떠오른 어린 시절의 추억.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줄곧 반장이었다. 하는 일은, 수업 시작에 앞서 선생님 들어오시기 전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과 교련 선생님 또는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아이들이 읽는 만화책과 하이틴로맨스를 압수해다가 바치는 것이었다.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와 대걸레가 있던 나무 장이 떠오른다. 친구들의 얼굴도 교실의 모습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신발장이라고 떠올리는 그 가구만은 또렷하게 생각난다. 아이들이 읽던 만화책과 하이틴로맨스를 압수하면 그 신발장 빗자루 사이 틈에 모아두었다. 그곳에 모았다가 선생님께 공물처럼 바치기도 하고 때론 불심검문을 대비해 미리 숨겼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그런 반장이었는데도 아이들이 크게 저항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상황에서 내 입장은 뭔가 모호하고 유약한 면이 있다. 삼십 년도 더 된 이 기억 속 신발장이 열쇠가 있던 긴 사물함 같은 걸로 생각나는 건 왜일까? 열쇠를 생각하면 열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고 이어, 그 장이 열렸을 때, 무슨 이유였는지 그곳에 있던 대걸레 자루를 들고 테니스 선수였던 덩치 큰 여학생을 때리던 남자 선생님이 떠올라 괴롭다.

     문득 무슨 이야기 끝이었을까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반장(고 3 때만 부반장) 한 사람이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신부님 모시고 일할 때였다. 그때 신부님이 물으셨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신부님만 그렇게 물으시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 이 기억을 소환해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은 물어 온다. “그래서요?”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나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다. “나는 반장 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조차도 내게 되묻는다. 그래서요?     

    오랜 시간이 지나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않던 이런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난감한 표정으로 “그래…, 그렇게 해보렴.” 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왕 조용필이 활동할 때 전영록이라는 가수가 있었다. 작고 귀엽고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같은 밝은 노래를 불렀던 그는 나의 스타였다. 언젠가 그가 나의 친오빠라며 찾아오는 가족 소설 속에서 잠들던 때, 그의 영화가 우리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상영된다기에 그저 보고 싶었다. 그때 엄마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영화관에 가 보고서 알았다. 전영록의 영화를 본다는 것만 생각했지, 동시상영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몰랐다. 영화관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껄렁한 아저씨들, 숨을 쉴 수도 없이 두려웠던 어둠….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엄마가 “안 돼, 하지 마.”라고 한 일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욕인지도 모르고 친구한테 했다가 호되게 혼났던 일 말고는. 학교에서 만화책과 하이틴로맨스를 뺏는 일을 하는 나인데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따뜻한 아랫목에 앉히고 솜이불을 덮어주고는 만화책을 한 아름 빌려다 위에 던져 줬다. 이현세나 허영만의 만화였던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만화 읽느라 아빠 오신 줄도 모르는 우리에게 엄마가 헐레벌떡 달려오시면, 급히 이불 밑으로 만화책을 밀어 넣고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던 기억만 남아 있다. 공부 방해된다고 비디오도 놔주지 않던 아빠와 달리(그럴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느 집에서 버린 비디오를 주워다가 『베르사유의 장미』를 보게 해 주던 엄마. 나는 그렇게 엄마가 보여줘 만화 보물섬도 읽었고 아줌마들이 보는 여성 중앙도 읽었고 유리문 달린 외갓집 책장에서 꺼내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때도 연속극이라고 해서 TV 드라마가 인기였다. 가끔 생각했다. 캔디와 테리우스, 앤서니에 열광하고 오스카를 사랑했던 여자들이 즐겨 보는 드라마인데 여자 주인공 예쁜 것만 신경을 쓰고 남자 주인공이 아름다워야 할 필요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요즘 ‘한류’를 보면서 또 생각한다. 그때 하이틴로맨스를 보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가 작가가 된 것은 아닐까, 조용필과 전영록에 열광하던 누군가가 K-팬덤 문화를 낳은 건 아닐까. 요즘은 남자 배우 여자 배우 할 것 없이 화장하고 외모를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남자 가수들이 여성복을 입어서 완판을 시키는 일이 가능한 시대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옛날 우리 반 테니스 선수였던 친구가 선생님께 왜 대걸레로 맞았었는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입어보지 않은 세대인 나는 기억한다. 복장과 머리 모양이 자유였음에도 자잘한 규율이 많았다. 교련 수업도 있었다(미국으로 떠나는 친구에게서 이별 선물로 받은 하얀 코끼리 모양의 상아 브로치는 교련 선생님께 압수된 이후로 행방을 모른다). 그 친구는 멋 부리길 좋아했다. 앞머리를 세팅하고 스프레이 무스로 단단히 세우고 다녔다. 복장도,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스포츠 반바지를 입었다. 그 모든 태도가 선생님 맘에 들지 않았고, 그 친구는, 단지 자신에게 편하고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인데, 지적당하고 심지어 머리를 맞았으며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는 훈계를 들어야 하는 게 억울했다. 대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화가 났고 대걸레를 들었으며(신발장을 잠가 놓지 않았어) 아무리 운동했다지만 여학생을 남자 선생님은 무자비하게 때렸다. 부당한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이유는 아파서 펄쩍펄쩍 뛰는 친구를 보면서도 때리는 사람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힘으로 당해볼 수 없는 남자 체육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나 자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외면한 채 소리 없이 흘렸던 눈물 때문이다. 여고에서는 전교 회장이든 뭐든 ‘톰보이’ 스타일의 친구가 인기가 많았다. 선생님께 맞던 그 친구도 그런 스타일이었다. 여자지만 남자 같기도 한 그 친구들에겐 남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기사가 하나 있다. 도쿄 올림픽에서 3관왕이 된 안산 선수가 머리를 남자처럼 커트했다는 이유로, 도대체 왜 페미니스트가 혐오의 언어인지 모르겠지만, ‘페미’라며(남편이 ‘페미’가 뭐냐고 물어온다)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거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지만, 오늘 아침에 이 닦을 때 느꼈던 기분처럼 편치 않았다. 이건 폭력, 대걸레를 들고 휘둘렀던 옛날 그 선생님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페미’나, 그들이나, 똑같이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맞았다고 더 아프다고 그러니 너도 더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긴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판에 ‘페미’로 시작하는 말이면 다 한 가지인 줄 아는 이들에게, 기사도 쓰는 그들에게, 억지 소몰이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뮤지컬 헤드윅의 ‘The origin of love(사랑의 기원)’ 가사이기도하다). 남녀의 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제3의 성이 있었다는 이야기. 인간의 성별은 원래 세 개, 완전히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인간은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둘로 찢어졌다, 갈라져 나간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는 두 존재가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인류는 상처를 고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옛날의 상태를 회복시켜 주는 사랑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다른 반쪽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론도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에 따르면, 나의 친구여, 그 반쪽이나 전체가 선한 것이 아닌 한, 사랑이란 반쪽이나 전체에 대한 욕구는 아닙니다.’     

‘사랑이 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 속에서 잉태하게 하는 것이고, 이러한 잉태는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말이 옳다 그르다 따져보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플라톤이 ‘이상’을 이야기한다 한들 시대마다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 오래된 철학책을 읽다 보니, 세상에는 분명히 다수를 차지하는 남자와 여자 외에도 다른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기원전 5세기부터 지금까지면 2,500년도 넘은 논쟁거리란 이야기가 되나? 아리스토파네스 얘기로 ‘남녀동체’라는 말은 모욕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말이 좀 더 포용력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여자보다 다리가 더 예쁜 남자도 있고, 튼실하게 굵은 허벅지를 가진 여자도 있고, 털이 많은 여자도 있고 털 없는 남자도 있고…. 사람들의 모습은 상반되어 보이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름 고유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AI에게 구별 없이 옷을 입은 사람들을 외모만 보고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라 하면 완벽하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에는 황금비율이 아름다움을 결정했듯이, 지금이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들이 있을 뿐인 건 아닐까? 저마다 각각 좋은 게 있는 거지. 다리 굵은 여자가 가늘고 예쁜 다리를 가진 남자를 ‘아름답다’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아들 양궁 할 때 얘기를 들어 보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정신 집중 의미로 선수들 머리를 짧게 밀라 한다고 한다(따지고 보면 이것도 폭력이지). 여자 선수의 경우는 달라야 할까?     


       ‘인간 사랑의 유일한 대상은 선한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한참 변한 세상에 선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랑의 신비에 접근하는 또는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는 올바른 길’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의 예로부터 시작해서 이 예들을 발판으로 삼아 최종 목표인 절대적 아름다움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생애를 바쳐야 할 분야’이다. 


    나는 오늘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저마다 신념들이 있다. 그냥 거기까지만 하면 좋으련만. 우리 아이가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보면 다행히 우리 때 흔하게 볼 수 있던 폭력 장면은 확연히 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폭력은 좀 더 은밀하게 새로운 대상을 찾고 있다. 지금 나는 외면한 채 울기만 하던 그때 그 여학생이 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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