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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Jul 27. 2023

한국계 이민자의 입덧

 널 원해 한식, 그 말밖엔

    내가 미국에서 산다고 할 때, “그럼 매일 햄버거를 먹는 거예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아마 매일 김치를 먹는 한국인이 흔하니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3억 3천만이 넘는 미국 인구 중 햄버거가 주식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우리 집에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간단히 요리해서 먹는다.


고기 혹은 생선을 간한다.

채소 한두 종류씩 간한다.

오븐에 굽거나, 프라이팬에 볶는다.

밥이나 식사빵과 함께 먹는다. 끝.


  기본적으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식이섬유의 조합이다. 그게 질린다 싶을 때는 한식, 타코, 파스타, 샌드위치, 인도음식 등의 메뉴를 돌린다. 수제 햄버거는 가벼운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 주로 먹는다.


    한식이 주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한식에 큰 미련이 없다. 20대 초반 영국 어학연수 시절부터 그랬다. 한식 재료는 굳이 안 싸들고 갔다. 홈스테이 가족이 해 주는 음식을 같이 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그리울 땐 주말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십여 년이 흘러 미국에 정착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딱히 한식이 필수라는 생각이 안 든다. 


    아시안 슈퍼에서 한식 재료를 구할 수는 있다. 한국보다 품질과 신선도가 떨어지는데도, 가격은 두세 배 높다. 조리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기서 한식을 삼시세끼 요리하는 것은 효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한식은 가끔 생각날 때 소량으로 해서 먹었다. 김치는 아시안 슈퍼에서 꾸준히 사다 먹었지만, 밑반찬을 해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 그릇 음식이 대부분이었고, 국이나 찌개도 자주 끓이지 않았다. 조리과정도 쉽고, 설거지도 편해서 만족스러운 식생활이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임신을 했다. 나의 온몸과 마음이 한식을 원하고 부르짖었다. 나의 입덧은 먹덧이었다. 먹어야만 메스꺼움이 멈춘다. 두세 시간 있으면 또 구역감이 든다. 또 먹어야 하는데, 한국음식이 너무 간절했다. 제대로 끓인 삼겹살 김치찌개와 찹쌀 순댓국이 먹고 싶었다. 내가 한식을 이렇게까지 좋아했다니. 미처 몰랐다. 아니, 이게 좋아하는 건가? 호불호의 문제라기보다는 근원적인 본능의 영역이었다. 먹고 싶다기보다는, 먹어야만 한다.

 

    문제는, 너무나 기초적인 내 한식 실력이었다. 이민생활 5년간 김치찌개를 만든 적이 손에 꼽힌다. 평소 내 요리 실력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한식은 예외다. 내가 끓인 국과 찌개는 밍밍하다. 경험이 있어야 실력이 느는데, 지금 실력을 키우기엔 늦었다. 그제야 나는 평소에 한식 만드는 연습 좀 할 걸, 하고 생각했다. 이런 돌발 상황은 예상 못 했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어디서 한식을 사 먹기도 힘들었다. 동네에 한식당이 한 곳 있긴 한데, 대학생 위주의 도시락집 같은 느낌이다. 내가 찾는 한국의 깊고 진한 맛이 아니었다. 입맛에 영 안 맞아서 자주 갈 수는 없었다. 한인타운이 있는 대도시까지는 자동차로 편도 7시간 걸린다. 직장 때문에 당장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나마 많이 해 봤던 고추장 돼지고기 볶음과 장조림, 미역국만 줄곧 해 먹었다. 그래도 할 줄 아는 한식이 몇 개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한식이 나에게 그리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곧 뭘 먹어도 역한 시기가 왔다. 새콤한 맛은 그나마 잘 들어갔다. 날생선이 없는 초밥 구내식당에서 1일 1팩 사 먹고, 저녁은 레토르트 냉면만 먹었다. 어느 날, 면 삶는 냄새가 확 역해졌다. 그나마 잘 먹던 냉면도 못 만들어 먹으니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동네 식당들을 다 돌며 그나마 먹히는 것을 찾아다녔다.


    얼마 안 가, 면 삶는 냄새뿐 아니라 부엌에서 나는 모든 냄새를 참을 수 없게 됐다. 남편이 돼지고기를 요리하고 있는데 그 냄새가 너무 끔찍했다. 이게 뭐야. 임신하면서 이상해져 버린 비위가 괜히 서글퍼 눈물이 났다. 그 후로 한동안은 ‘돼지고기’ 단어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웠다. (웃긴 건, 영어로 ‘pork’를 들으면 괜찮았는데, 한국어로 ‘돼지고기’를 들을 때만 반응이 왔다는 것이다. 대체 뭐지?) 한국에서 소소하게 먹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내 한식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대장금 급의 한식 명인이라 치자. 일단 부엌 출입이 가능해야 뭐라도 결과물을 낼 것 아닌가? 대장금도 입덧할 때는 남이 해 준 음식을 먹는 게 최선일 것이다.


    내 고향에서 임신했으면 음식 걱정은 없었겠지. 퇴근길에 떡볶이랑 오징어 튀김 사다가 후루룩 먹고, 동치미도 반찬가게에서 손쉽게 사 먹고. 순댓국만 삼시세끼 원 없이 먹을 수도 있을 거다. 동네에 딱 하나 있는 아시안 슈퍼에서 겨우 구한 레토르트 냉면과는 비교 불가능한 꼬들꼬들한 함흥냉면 면발을 매일 음미한다면. 뜨끈한 왕만두 한 입, 시원한 육수 한 입씩 번갈아 먹으면 얼마나 황홀할까.  


    특정한 누가 해 준 음식도 먹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다. 우리 언니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언니가 무심히 부쳐 줬던 고추장떡. 언니는 기억도 안 난다는데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그 고추장떡은 내가 만들어도 그 맛이 안 난다. 명절 때 먹던 바삭바삭한 부침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바삭함을 재현할 수 없다. 나 자신의 무력함이 느껴졌다. 서러웠다. 임신 전까지는 내가 한식에 이렇게 목을 맬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입덧이 절정일 때에는 미각도 없어져 맛도 못 느끼는 주제에 한식만 갈구했다.




    거짓말처럼, 출산과 동시에 한식에 대한 집착은 사라졌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출산 전보다는 한식을 많이 해 먹지만, 여전히 한식이 주식은 아니다. 입덧 시절의 경험이 신기루 같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내 몸이 낯선 세포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 모체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해서 원초적인 식욕을 불러들였던 걸까? 성장 과정에 먹던 안전한 음식들을 받아들여 모체를 보호하려고? 마치 내 몸이 나에게 경고를 보냈던 것 같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안전성이 보장된 음식을 섭취하여 신체의 안위를 확보하라!”


    어쩔 수 없이 이민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 한식도 잘 안 먹고, 한국 방송을 많이 보지도 않았다.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향수병 하나 없이 이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잘 녹아드는 듯했다. 그러다가 응급상황에 깜짝 상자처럼 한국이 튀어나왔다. 


    한식 재료가 신선도가 떨어지고, 가격이 높다? 효율성이 낮다? 아무 상관없다. 나의 무의식은 효율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애타게 바라고 원할 뿐. 


    평온한 삶에서는 나올 수 없었던 나의 진심이, 입덧을 하며 와르르 쏟아졌던 걸까?


    아마 나는, 이민 생활 내내 한식이 그리웠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냥 포기했다. 제대로 된 한식을 못 먹을 바엔, 그냥 안 먹는 삶을 선택한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나는 향수병도 없이 거뜬하게 적응해서 살고 있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되뇌며 살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어떻게 타지생활이 항상 괜찮기만 할까.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궁지에 몰린 내 몸이 나에게 화두를 던졌다. 


"사실은 안 괜찮을 때도 많았는데, 그냥 모른척했던 것 아냐?"


    그래, 정말 그랬을지도. 




    내 입덧은 생각지도 못한 향수병을 동반했다. 임신 시기뿐 아니라 육아 중에도 '이게 향수병이구나.'라고 느꼈던 순간이 꽤 많았다. 이렇게 겪고 보니, 향수병은 몸과 마음이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때 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민 와서 학교를 다시 다니고 취업을 하며 꽤 힘들게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임신에서 육아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고생이었다. 대문자로 쓴 것처럼 확실한 형태의 향수병을 몰고 올 만큼.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상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힘들 때 자연스럽게 밀려왔다가, 좀 나아지면 빠져나가는 파도 같다. 


    아이가 만 3세인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언제고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또 올 것이 확실하다. 타국에 살면서 그 파도를 아예 못 오게 막을 수는 없다. 모른척하면 나중에 더 크게 몰려온다. 그냥 오면 오는 대로 맞아들이려 한다.


    이제는 향수병이 슬슬 온다 싶으면 즉시 남편에게 알리고 대책을 세운다. 내가 뭘 원하는지 깊이 생각한다. '요즘 한식을 너무 안 먹었나? 한국어 대화가 부족한가? 아니면 한국 방송을 보고 싶은가?'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판단이 내려지면 즉시 해결 방안을 실천한다. 한국계 이민자가 타지에서 괜찮게 지내려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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