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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Aug 14. 2023

하룻밤의 미국 모자동실 체험

미역국 좀 갖고 올걸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병실로 옮겨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1인 1실로, 산모와 아기가 같이 지내는 모자동실이었다. 아기는 난간이 둘러진 작은 신생아용 침상에 누웠다. 나는 수술 전날 잠을 거의 못 자서 피곤했으나, 졸리지는 않았다. 어지러울 뿐이었다. 아기와 내가 각자 침상에 누운 모습을 남편이 사진으로 남겼다. 눈 꼭 감고 입 꾹 다문 얼굴이 은근히 닮아 있어 웃음이 나왔다.  


    출산 후 첫 식사를 할 시간이 왔다. 집에 해 둔 미역국을 굳이 가져올 생각도 없었고, ‘나는 여기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며 스스로의 털털함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라 별생각 없이 돼지고기구이와 으깬 감자를 주문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대실수다. 마취약의 영향으로 나에겐 아직 구역감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고기를 아무리 씹어도 넘기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으깬 감자만 아주 조금씩 입에 넣고 한참 물고 있다가 겨우 삼켰다.

                

    수술 직후 바로 일반식에 도전한 건 뼈아픈 실수였다. 예전에 읽었던 미국 출산 후기들에서는, 출산 후 바로 스테이크나 햄버거 등을 먹었다는 얘기가 꽤 나왔다. 나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여겼건만,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가뜩이나 원래 이도 약한데, 수술 후 어지럼증과 구역감마저 심했던 탓에 돼지고기구이는 영 무리였던 것이다.


    한국 음식이든 아니든, 따뜻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을 먹어야 했다. 오트밀이나 밀죽(cream of wheat), 혹은 갈은 사과(apple sauce) 같은 아침 식사 메뉴라도 달라고 했어야 했다.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미역국을 가져갈 것 같다. 그도 번거로우면 출산가방에 레토르트 즉석죽이라도 챙겨 넣을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된 것, 먹어야 산다는 일념으로 으깬 감자를 머금고 오래오래 녹여 끝까지 먹었다. 다행히 첫 식사 이후부터는 일반 병원식도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출산 직후에 일가친척들과 지인들이 병실로 찾아와서 아기를 보고, 풍선이나 색지 등으로 실내를 꾸며 병실 파티를 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나의 출산 당시에는 심각한 코로나 상황이라, 같은 도시에 사는 시가 식구들조차 아기를 보러 오지 못했다. 아기 우는 소리 외에는 출산 병동 전체가 고요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출산한 미국 출신 산모들은 적막한 분위기에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외향성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나 또한 우리 셋 뿐인 병실이 슬펐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나는 주위가 한적할수록 마음이 충만해지는 내향인이다. 오직 우리 세 가족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병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반신 마취가 풀리며 뱃가죽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배를 일자로 그어서 열었다가 꿰맨 지 몇 시간 안 된 상황인데, 손님들이 축하해 주러 왔어도 무슨 정신으로 맞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침대 위를 오르내릴 때 통증이 가장 심했다. 간호사가 때마다 진통제를 넉넉히 주어 다행이었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엄청난 고통이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쳤다.


    그 와중에 모유수유를 한다고 두 시간에 한 번씩 아기를 안고 있었다. 나오는 건 하나도 없는데,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언제 나올 줄 알고? 우리 아기가 배고프지 않을까. 이게 맞는 건가?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 모유수유 자세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잘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쨌다가 다시 붙인 배가 아파 죽겠다.




    아기는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주로 끙끙대고, 크게 울기도 했다. 그러다가 잤다. 낮에는 그래도 아기가 잠깐 자는 시간이 꽤 있었는데, 밤이 되자 아기가 우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간호사 호출벨을 눌러서 아기가 왜 우는지 물어봤다. 정상이니까, 안아 주고 모유수유를 시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내가 누워서 안고 달래고, 남편이 서서 달래고 하면서 날밤을 새웠다.


    새벽에 진통제를 주러 온 간호사가, 우리를 troopers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라고 불렀다. 잘한다는 건가? 우리가 딱히 뭘 했길래? 비몽사몽 혼란한 와중에, 아기가 자꾸 게우는데 어떻게 하냐고 질문했다. 간호사는 신생아가 게우는 건 정상 범주라며 계속 지켜보잔다. 병실에 제공된 고무 스포이드로 아기 입에 남은 잔여물을 제거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도 했다.


    강성 울음과 구토. 보통 성인의 일상에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명확한 신호다. 이게 다 정상이라니. 말이 되는가? 신생아의 '정상'은 너무나 다르다. 아기는 새로운 우주로 우리를 초대했다. 이제까지의 상식이 뒤집힌 시공간이다. 우리는 그전에 살았던 우주로는 영원히 못 돌아간다. 나와 남편은 아무 확신조차 없이 그저 물어물어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 잠은 다 잤다는 것.


    중요한 깨달음을 남긴 모자동실 생활은, 아기가 이튿날 아침 폐 문제로 *니큐에 입원하며 하루 만에 막을 내렸다. 그렇게 되자 괴로웠던 지난밤이 간절히 그리워졌다. 아기가 다시 내 병실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결국 이틀 후 내가 먼저 퇴원하게 되었다.


    아기를 태울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설치했던 카시트가 텅 비어 있었다. 눈물을 꾹 참고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 기운 쓸 일이 천지인데, 울다가 지칠 순 없었다.



*니큐: NICU. 신생아 집중치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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