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이기만한 내 롤모델
코로나 감염 환자가 20만 명을 넘어가던 시기, 코로나에 걸리면 마치 철없는 행동을 한 사람대접을 받는 분위기였다. 그런 시기에 직장에서 최초로 발생한 코로나 환자가 되었다. 관리자에게 보고를 드리려 거는 전화의 수신음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코로나19 감염 기운이 있었지만, 직장내 최초 발생 환자라는 타이틀이 두려워 이를 숨기고 출근했던 직장 동료에게서 전염되었다. 그런 해프닝이 그 분과의 첫 인연이었다.
5-6년 뒤면 퇴직을 앞둔 그 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나이를 2분할해도 더 어린 사람에게 코로나19 감염 최초환자 누명을 씌우려고 하다니. 그런 사람과 같은 학년으로서 1년을 살아갈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승진 욕심도 없고 그저 편안히 직장 생활을 하려다 은퇴를 보내려는 그분 곁에서 남은 내 1년은 어쩌면 돌쇠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좋았던 건 한없이 가벼운 그분의 태도가 나의 유머 코드와 맞아 같이 회의할 때면 꽤 웃을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게 이럴 때 사용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으로 인해 우리 동학년은 학기초에 전원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그 후로는 전원 면역을 갖게 되어 교내에서 공백없이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학년에서는 계속해서 코로나 19 감염 환자가 발생해 학교 업무가 마비가 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우리 학년은 되려 영웅 취급을 받기도 할 정도였다.
하루는 동학년과 함께 근교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시기 즈음 대화의 주된 주제는 결혼이었다. 나를 제외한 동학년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결혼한 유부녀라는 것이다. 그 날도 카페에 경치 좋은 자리에 앉아 나를 둘러싸고 결혼에 대해 설교하며 결혼을 하기 위한 남편의 책임감을 강조하였다. 이야기의 끝은 남편에 대한 불만이었다. 서로 돌아가며 각기 다른 이유로 남편 욕을 하며 다음 생에 결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는 결혼을 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헷갈렸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다음 생이 있다면 결혼을 지금 남편이랑 다시 하겠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놀랍게도 그분이셨다. 다들 운전을 못 하셔서 어딜 나가면 항상 내 차로 다니곤 하는데 그 날 집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그분에게서 주유권이 보내져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돈을 모아서 보내준 거라고 하셨지만 왠지 혼자서 보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그분을 매일 관찰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선행이나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널리 알려 그 사람을 흐뭇하게 해주는 재주가 뛰어나신 분이었다. 누군가 헤어 스타일이라도 바꾼 날이면 어떻게든 널리 알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분의 바뀐 헤어스타일을 칭찬하게 만드셨다. 막내라서 학년에서 맡은 업무가 많았지만 그 중 하나가 학년 탕비실 간식 담당이었다. 간식을 새로 채워 넣은 날에는 간식이 풍성하고 진열이 예쁘다며 항상 칭찬해주시고 사진을 찍어서 주변에 홍보해대는 통에 어느새 학교에서 나는 마트 사장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덕분에 더 신이 나서 간식을 자주 주문해 동학년 간식 회비가 자주 동이 나곤 했다.
가끔 전담 수업이 겹치면 단둘이 학년 연구실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분의 인생사를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좋은 남편을 만나 두 딸을 낳고 이제 교사로서 정년을 앞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가벼운 태도로 살아갈 수 있었나 하는 편견이 실은 조금 있었다. 그 분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분에 관한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린 시절 꿈은 기자였다고 한다. 교내에서 공부를 꽤 잘했는데 복잡한 사정으로 강제로 교육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가기 어려운 대학이었지만 일주일 내내 펑펑 울고 다녀서 그 누구도 축하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학원에 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승진 욕심을 내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을까? 누구보다 승진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음에도 승진을 하지 않고 평교사로 교직을 마감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그런 추측을 함부로 하게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인 첫째는 부모님을 닮아 공부를 굉장히 잘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갑자기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자상하던 남편도 그 당시에 그분의 단호하지 못함을 탓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 딸은 시간이 지나 소방관이라는 꿈을 찾아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응급구조학과에 들어와 열심히 대학 생활에 임하고 있다. 하루는 테이블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 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씩 제 길을 찾아 가고 있는 것 같아요. ”
그 쪽지를 들고 또 펑펑 우셨다는 그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나도 모르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오늘은 에세이 클래스’에 가입한지 3개월 남짓한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꼭꼭 숨겨놨던 글들을 용기 내서 그 분에게 건넸다. 부족한 글임을 알았음에도 자신이 좋았던 문장을 되짚어주는 그분의 따뜻함에 감사했고, 또 둘만의 비밀을 만든 것 같아 즐거웠다. 본인도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지만 결말은 자신의 죽음을 하늘 위에서 자신의 영혼이 지켜보는 장면이라고 한다. 조금은 으스스한 결말이다. 가끔 인생에 관해서 토론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인생은 항상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고, 모든 걸 다 경험하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분은 지금 생으로도 벅차다며, 다음 생은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런 대화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어려운 그 소설의 결말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까지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인생을 살고 계신걸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참 어른에게 경솔한 생각이라는 걸 깨달아 금세 그런 생각을 비우곤 했다.
그 분을 따라 2년을 같은 학년으로 보내며 다시 한해를 마무리할 때 즈음 나는 다음해에 부산에 가기로 했고, 그 분은 갑작스레 명예 퇴직을 신청했다고 하셨다. 누구 하나 남지 않고 모두 각자의 길로 떠나는 이별이라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에 새로운 학교에 첫 출근을 하는 중에 그분에게서 사진 한 장이 문자로 왔었다. 햇빛이 찬란하고 하얀 백사장이 어울리는 보라카이 해변 사진이었다. 순간 얄미우면서도 ‘이제는 조금 홀가분해지신걸까?’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보통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위인이나 유명한 사람을 부르곤 했다. 그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와 관련 없는 그 당시 유명한 제 3자를 언급하곤 했다. 현재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그분이다. 아픔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했다. 다리가 잘린 사람을 두고도 본인의 새끼 손가락에 베인 상처가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아물지 않은 상처를 티내지 않고 견디며 타인에게 반창고를 건네는 그분의 온기를 닮고 싶다.
이 글의 작성을 망설였던 건 객관적이지 않은 나의 시선으로 멋대로 색칠한 타인의 인생을 제 3자에게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게 된 건 에세이는 솔직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닮고 싶냐고 하기에는 닮고 싶은 모습은 아직까지는 추상적이다. 가끔은 철이 없는 소녀 같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감동을 주는 따뜻한 성인 같다. 솜사탕 같은 닮고싶은 모습을 억지로 뭉개고 뭉개면 그 분의 모습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뭉뚱그려 그 분을 닮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의 성공보다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위를 우선에 두는 삶일까? 아니면 그냥 낙천적인 삶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 분을 알게된 뒤로 날이 선 내 모습이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