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텃밭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이러저러한 핑계로 미뤄왔던 텃밭에 다녀왔다. 며칠 뒤에 비 소식이 있어 그전에 풀매기를 하고 마늘쫑을 거두는 게 좋겠다 싶었다. 무릎 높이로 자란 마늘 사이로 풀이 한 뼘 길이로 올라와 있었다. 짧은 부추낫을 들고 왔지만 흙은 부드럽고 풀도 아직은 여려서 한 손으로도 쉽게 뽑혔다. 손에 쥔 풀 사이로 땅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바람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숲우듬지 사이로는 박새, 딱새, 딱따구리, 되지빠귀와 호랑지빠귀, 뻐꾸기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까마귀 두어 마리가 아랫농장의 암탉 소리를 따라 하며 놀다가 사라지고 얼마쯤 지나 물까치 한 마리가 대추나무 그늘에 날아들어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직박구리도 그에 합세하면서 텃밭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매라도 나타났나 싶어 이리저리 돌아보니 웬일인지 까치 세 마리가 텃밭 근처에 나타났다. 직박구리 두 마리가 번갈아 날아 차기를 시도했지만 볼을 지키는 축구선수처럼 등을 지고 서서 가볍게 튕겨냈다. 까치들은 농막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고는 재미없다는 듯 까악- 소리를 짧게 주고받았다. 건달 같은 녀석들이 떠나고 직박구리의 농성도 끝났다. 텃밭은 다시 조용해졌다.
플매기를 거의 마칠 즈음, 차 한 대가 올라왔다. 처음 보는 SUV 안에서 키가 큰 노인이 내렸다.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인사 대신 대뜸 땅주인 오늘 안 나왔냐고 묻는다. 대답도 하기 전에 밭을 돌아보며 ’ 풀이 왜 이리 많아…쯧쯧‘ 한다. 내가 없는 사이에 여러 번 와본 모양이었다. 노인은 까치처럼 어슬렁 구시렁대다가 또다시 인사도 없이 큰 차를 끌고 내려갔다.
여기는 외진 곳이라 오다가다 우연히 들릴만한 데가 아니다. 이 동네에 사는 분들이 아닌 이상은 대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다. 대부분은 농작물을 노리는 이들. 밭에 들어와 냉이를 캐고 오가피와 두릅의 새순, 매실, 보리수, 마늘쫑 등을 훑어 간다. ’ 재수 없게 ‘ 나와 마주쳤을 때는 멀리서 조용히 되돌아가거나 ’이 걸 왜 아직 안 땄느냐’ 며 뻔뻔스레 말을 건넨다. 걱정도 팔자다.
나머지는 땅 보러 다니는 이들. 이미 지방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지만 ‘서울이 멀어서’, ‘애들이 찾아오질 않아서 ‘, ‘텃밭 가꾸기가 힘들어서’ 등등 이유는 갖가지. 마늘쫑을 거두고 있는데 한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길 아래 땅을 사서 살고 있단다. 흙이 좋다 마늘이 잘 자랐다 경치가 좋다 칭찬을 늘어놓더니, 묵논까지 흙을 메워서 집을 지으면 딱 좋겠단다. 에휴.
사실 오늘 밭에 오면서 이렇게 게으른 주말농부 역할은 올해까지만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맘이 바뀌었다.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이곳이 가능한 오래 남아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