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동물의 털을 입지 말자

'옷을 입는 여자'

by 소재수집가

비버, 라쿤, 여우, 밍크, 친칠라, 앙고라토끼 등 부드러운 동물의 털은 오랫동안 패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소재로 군림해 왔다. 이들은 모피가 되어 수세기 동안 옷장 속 '가장 비싼 옷'의 자리를 차지했고, 동물 종류의 희귀성은 곧 부와 권력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특히 16세기 이전 유럽에서 모피는 신분을 시각적으로 구분하는 장치였는데, 양이나 족제비, 여우보다 훨씬 귀한 담비(sable)는 왕족과 최고위 귀족만이 착용할 수 있는 절대적 상징이었다. 담비의 털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가 곧 한 사람의 사회적 위계와 경제력을 드러내는 지표였던 것이다.


Photograph--Cabinet-Card--Men--Beaver--Hats.jpg 비버 펠트 모자


이처럼 모피는 부와 계급 그리고 권력 같은 상징적 자본을 드러내는 방식이었고,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어 '절대적인 모피'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말하자면 실용적인 럭셔리가 등장한다. 바로 '비버(beaver)'다. 작고 순한 외모의 비버는 예상 밖으로 16세기 후반 파리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그 계기는 모자였다. 1580년대 유럽 전역에서 비버 펠트 모자가 폭발적 유행을 하면서 비버는 단순한 모피 자재를 넘어 하나의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소재가 되었다.


비버는 씨가 마를 정도로 보이는 대로 모피로 만들어졌고, 비버 모자는 유산상속 목록에 오를 만큼 귀하게 취급되었다. 1732년 영국이 식민지의 모자 생산자들에게 비버 모자를 식민지 밖으로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모자 조례(Hat Act)'를 제정했을 정도로 비버 모자를 둘러싼 경제적 가치와 경쟁은 상상을 초월했다.


비버에 대한 욕망은 결국 캐나다라는 나라의 형성과도 깊이 연결된다. 비버 펠트 모자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는 유럽인들을 더 많은 비버가 서식하는 지역으로 이끌었고, 그 탐욕의 궤적은 시베리아를 지나 북아메리카로 향하게 했다. 비버를 찾아 강을 거슬로 올라가고 숲 깊숙이 들어가며 만들어진 교역로와 모피 무역의 거점들은 훗날 캐나다 영토의 윤곽이 되었다. 다시 말해 비버는 우연히 발견된 자원이 아니라 북아메리카 특히 캐나다에 대한 유럽의 탐험과 정착을 실질적으로 촉발한 핵심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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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비버를 따라 북아메리카로 진출한 프랑스와 영국은 캐나다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결국 캐나다는 영국령이 되었지만, 프랑스인들이 먼저 정착했던 퀘벡 지역에는 지금까지도 언어와 문화, 정체성의 갈등이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버 모자가 세계사를 다시 썼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캐나다를 상징하는 동물은 비버이며, 실제로 캐나다 동전에는 비버가 새겨져 있다. 작은 동물의 털 한 올이 대륙의 지도와 제국의 경쟁, 한 나라의 정체성까지 움직인 셈이다.


300여 년 간 이어져 온 비버 모자의 인기는 결국 또 다른 유행 앞에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19세기에 들어 실크로 만든 모자가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면서 비버 펠트 모자는 패션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또 하나의 유행이 거의 씨가 마를 뻔했던 비버의 무차별적 살육을 간신히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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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를 포함해 부와 권력, 세계정세까지 움직였던 모피는 이제 윤리와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기준 앞에 놓이며,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1990년대 퍼프리(fur free)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동물권과 윤리적 소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모피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럭셔리의 상징이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구찌, 프라다, 버버리 같은 여러 럭셔리 브랜드들은 동물의 털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잇달아 발표했고, 이는 패션 산업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패션이 스스로의 욕망과 책임을 다시 묻는 장면이다.


추운 겨울, 우리의 손 위에, 목 위에, 어쩌면 몸 위에 걸쳐 있을지 모를 동물의 털이 새로운 기준 앞에 놓였고, 패션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부드러움 뒤에 숨겨진 역사와 폭력, 욕망과 세계사의 궤적을 떠올리게 한다. 패션은 늘 시대의 욕망을 가장 먼저 입어왔고, 이제는 그 욕망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단계에 와 있다. 무엇을 입을 것인가는 곧 어떤 세계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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