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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19. 2024

상엿집의  단상  ㅡ  수필가 한연희

김왕식








               상엿집의  단상

           

                  수필가 文希 한연희





  상엿집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널 때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는 곳이다
 우리 마을에도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 모퉁이 외딴곳에 상엿집이 있었다.
외진 곳에 지어 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이유는 이곳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금단의 장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사람 발길이 뜸하고 허름해서 무너지거나 허물어져도 방치하는 경우가 많아 으스스하고 두려운 장소였다.
 그 앞을 혼자 지나게 되면 귀신이 부르거나 삐그덕 문 여는 소리가 날까 봐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주뼛주뼛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어가곤 했다.

  친정아버님은 1976년 2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산 지 6년 후, 오십 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2대 독자여서 삼촌이나 사촌은 아얘 없었다.
대대로 내려온 고향 땅 부여 선산에 모시려고 집에 안치했다가 새벽에 장의차로 출발했다.
 찬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들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넓은 동네 수변은 천막과 돗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조문객과 상여가 대기하고 있었다. 관을 모셔놓고 조문객을 맞은 후 상여 멜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 상여를 메겠다는 상여꾼이 많아 두 패로 나눠 메기로 했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마지막 배웅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고마워 눈물이 더 났다.
 고인에 대한 정이요 성의라고 여기는 듯했다. 갑자기 상을 당해 슬픔에 빠진 우리 가족에겐 커다란 울림을 주는 반응이었다. 경건하게 상여를 멘 무리 앞에 나이 지긋하고 목청이 좋은 동네 분이 놋쇠 종을 들고 두건을 썼다. 그분의 지휘하에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합을 이루자 종을 흔들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앞에서 종을 치는 분이 선창 하자 상여꾼들이 "어어야~ 이이제~"라고 불렀다. 어느 순간 마치 무리 지어 춤추는 것 같이 보였다.
우리 가족은 가장을 잃은 설움에 애통하고 동네분들은 우리 가족 못지않게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이별을 슬퍼하셨다.
  구슬픈 상엿소리에 맞추어 아버님이 생전에 마을 사람들이 홍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쌓아놓은 제방둑을 끝까지 갔다가 오고 그다음 팀이 또 다녀온 후에야 마을 입구 언덕에 아버님의 산소를 썼다. 마을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그날만큼은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모를 만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선 집에 도착하면 아버님이 잘 치르고 왔냐며 조곤조곤 물으실 것만 같았다.
 어느새 반세기가 지났다. 당시의 모든 장면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길을 나서는 듯, 흔들리는 상여, 만장(깃발)이 몇 십 개 휘날리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아버님의 부재는 우리 가족 모두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커다란 보호막이 하루아침에 벗겨진 것처럼 날 것의 매서움을 경험했다.
여리던 마음이 여물어졌고 삶과 죽음은 떼어놓을 수없는 불가불의 관계라는 걸 알았다.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으니라.'쓰여 있듯이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 많다.
 잦은 경험인지 아님 나이 때문인지 죽음이 익숙하다. 그토록 섬뜩하던 상엿집도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잠시 요양원에 간호조무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내가 모든 일을 처리했다. 돌아가신 분과 한밤중에 단둘이 몇 시간씩 있어도 무섭지 않았다.
 어느 동네든 쉽게 볼 수 있었던 상엿집이 이젠 볼 기회가 없다. 가능하다면 상엿집 찾아 추억여행이라도 가고 싶을 만큼 그립다.
아버님의 삶이, 그날의 환상적인 장면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희 한연희 작가의 수필 '상엿집의 단상'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주제를 성찰하며,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를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모습을 묘사하며, 상엿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잊혀가는 전통의 소중함과 애환을 탐구한다.

작가는 상엿집을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상징적 장소로 설정한다. 외진 곳에 자리한 상엿집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어린 시절의 두려움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주는 긴장감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경험과 결합되어 작품에 깊은 감동을 더한다. 상엿소리와 상여꾼의 합창, 조문객들의 애도는 죽음이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짊어지는 삶의 의례임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특히,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장례 과정은 작가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사건으로 묘사된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작가는 삶의 날 것 같은 매서움을 경험하며,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성숙한 내면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서술은 죽음과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닫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작품의 미적 측면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통해 빛난다. 상여를 멘 무리가 춤을 추듯 움직이는 모습이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구슬픈 상엿소리는 전통 의식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며, 독자들에게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 전통 의식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또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대목은 작가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작품 말미에서 작가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의 상실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상엿집이 사라진 현대의 모습과 죽음이 익숙해진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전통이 점차 잊혀가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는 작가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통의 소중함과 죽음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상엿집의 단상'은 한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해 보편적 삶의 진리를 탐구한 수작이다. 문희 한연희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낀 두려움, 슬픔, 그리고 성찰의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이를 통해 전통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작품은 삶의 본질을 직시하며, 죽음이라는 필연적 여정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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