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기- 마지막
그녀가 어느 날 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잔을 들던 손이 멈췄다.
“뭐라고?”
그녀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배를 쓸어내렸다.
그 동작이 이상하게 느렸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 속엔 묘한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책임은 질 생각 없어.”
내 말은 마른나무조각처럼 떨어졌다.
“난 이미 그런 걸로 충분히 망가졌으니까. 게다가 난 가족이 있는 몸이야.”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알아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잔인하게 들려왔다.
그날 이후, 그녀는 조금씩 변했다.
전에는 아무 감정도 없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머물기 시작했다.
내가 오면 문을 열어두고,
술잔을 닦으며 기다렸다.
처음엔 낯설었고, 이윽고 불편해졌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수록 나는 죽어감을 느꼈다.
그녀가 말을 걸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그 무표정 속에서 문장이 흘러나왔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체온이 따뜻해질수록,
내가 쓰는 글은 점점 식어갔고 밤마다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싫어졌다.
그 안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더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요즘은… 글을 안 쓰시네요.”
그녀가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를 꺼내 물자,
그녀가 조용히 불을 붙였다.
불빛이 잠시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이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얼마나 함께 있었는지조차 모르는데,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이름이 뭐였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걸 이제야 묻네요. 와타나베 후미코.”
그 말은 무덤덤하게 조용했다.
창문 밖에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타고 흘렀다.
기모노 자락이 내 무릎에 닿았다.
젖은 천이 스쳤다.
그녀의 눈엔 이제 생기가 돌았다.
그 생기가 나를 겁먹게 했다.
마치 책임 없는 쾌락의 끝에서
이제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귓속에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잔을 비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술의 뜨거움이
이상하게 공허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여자는 이제 내 글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쓴 여자는 이미 죽어버렸다.
귀신이 사람을 사랑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살아나는 동안,
나는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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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비 내리는 새벽이었다.
술에 취한 나는 후미코의 방 문을 열었다.
등잔불이 흔들리고,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 빛 아래의 얼굴은 이상하게 어려 보였다.
갓 성인이 된 듯한,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걸친 얼굴이었다.
지금껏 나에게 말을 걸고, 잔을 따르고,
내 글을 이해하던 그 여자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그 목소리엔 아무런 꾸밈도, 깊이도 없었다.
그저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몸이 흔들렸다.
무너지는 건 나였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내 안의 마지막 문장을 지워버리고는 자신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얼굴을 때렸다.
술집 불빛이 멀리서 흔들렸다.
그 빛을 따라, 나는 무작정 걸었다.
결국 발이 멈춘 곳은,
그녀가 처음 일하던 술집 앞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간판의 불빛만이 깜빡였다.
나는 젖은 거리 위에 서 있었다.
발밑으로 흙물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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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그녀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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