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수기 -7
그날 밤 이후, 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숨결,
그녀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에 문장이 피었다.
나는 그것을 이용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필요로 했던 건,
그녀가 가진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이 나에게서 만들어내는 문장 때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내 곁에 있었다.
묻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글을 쓸 때면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영감이라는 이름의 주석에 불과했다.
때때로 그녀의 눈이 나를 스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균형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 문장에 바쳤고,
나는 그녀를 문장으로 찍어냈다.
그녀의 머리카락, 손끝, 입술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내 글의 재료가 되었다.
나는 글을 쓴 게 아니라,
그녀를 해체했다.
그녀의 침묵은 종종 내게 묘한 희열을 주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보다 훨씬 잔혹한 종류의 친밀함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문장은 길어졌다.
그녀가 조용히 숨을 고를 때마다
한 줄의 문장이 완성됐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이용한다는 걸 알았고,
나는 그녀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해와 체념,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잘 맞았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원고는 끝났다.
책은 예상보다 빨리 팔려 나갔다.
신문에는 내 이름이 실렸고,
거리의 서점 진열대마다 내 책이 꽂혀 있었다.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평론가들은 “인간의 내면을 해부한 문제작”이라 썼고,
몇몇 젊은 작가들은 내게 술을 사주며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이들이
한순간에 나를 ‘선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책을 펼쳐 들지도 않았다.
내 책 속 문장이
그녀의 체온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기분에 빠졌다.
연민과 피로, 그리고 약간의 혐오.
그녀의 손가락이 한때 내 글을 움직였지만
이제 그 손끝은 마치 낡은 펜촉처럼 닳아 있었다.
평론가들은 내 글을 두고 말했다.
“냉정하면서도 육체적이다.”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나는 그 말들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겐 그저 문장일 뿐이었다.
피와 살, 체온과 냄새를 글자로 바꾼 결과물.
동료 작가들은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했다.
“여자를 이용해 글을 쓴다더라.”
“그런 인간이 문학을 운운하다니.”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 다음 작품의 출간일을 묻고,
편집자에게 내 원고를 보여 달라 조용히 부탁했다.
모두가 나를 미워했고,
모두가 나를 흠모했다.
그 양극 사이에서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가끔은 내 원고를 다듬는 걸 도왔고,
가끔은 그냥 잠든 내 옆에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성공했지만,
무언가가 끝없이 비어갔다.
술을 마셔도, 이제는 그녀를 안아도, 문장을 써도
그 공허는 메워지지 않았다.
가끔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사랑조차 문장의 일부로 써버린 걸까?
그 답을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그녀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