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수기 - 5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이 있었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 내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요.”
술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어느새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늦은 봄의 비는 차가웠고,
골목마다 고인 흙물은 신발 밑창을 붙잡았다.
가로등 불빛이 비에 젖은 길 위로 길게 번져
그녀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그녀는 낡은 기모노를 걸치고 있었다.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해진 자락이 비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걷는 동안 기모노 끝이 무릎에 감겼다가 풀리며
축축한 공기를 헤집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내 귓속을 울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렸고,
그 냄새는 비누와 담배, 싸구려 향수의 잔향이 뒤섞인 것이었다.
나는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 못한 채,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걸음은 느렸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혹은 기다림에 지쳐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그녀가 허름한 2층집 앞에 멈춰 섰다.
현관 위에는 이름표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번호도, 표식도 없었다.
그저 빗물에 젖은 나무문만이
오래된 사람의 숨결처럼 삐걱이며 흔들렸다.
“여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올랐다.
젖은 나무 냄새, 눅눅한 이불의 곰팡내,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향수의 잔향이
코끝에 묻어났다.
그 순간,
내 안 어딘가에서 오래전 묻혀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했다.
방 안은 숨이 막힐 만큼 좁았다.
빗물에 젖은 기모노가 그녀가 킨 등불 아래서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벗어 다다미 위에 걸쳐두고,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속옷 차림으로 앉았다.
얇은 천 한 겹이 피부에 달라붙어, 불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윤곽이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시선은 벽을 향하고 있었지만, 귀는 그녀의 숨결을 따라가고 있었다.
바닥의 물방울이 천천히 말라가듯, 그 소리조차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녀는 찻잔을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따뜻한 게 좋을 줄 알았는데, 너무 미적지근하네요.”
그녀의 손끝이 내 손등을 스쳤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사토루 선생님은, 이런 걸 두려워하시나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빛이 흔들리며 그녀의 몸을 스쳤다.
기모노 안의 맨살 위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녀의 어깨, 쇄골, 그리고 다시 그 위로 떨어지는 한 줄기 머리카락.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서로에게 기대면 그뿐이에요.”
그녀는 내 옆으로 와서 조용히 앉았다.
젖은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조용했고, 빗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문득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욕망이 아니라, 허무였다.
체온이 닿을수록 이상하게 공허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알고 있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등잔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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