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격자살(人格自殺)

두번째수기 -4

by 추설

나는 흠칫 놀라 대답했다.

“뭐? 나보고 그딴 짓거리를 하라고? 그보다… 벙어리가 아니었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이라고는 거의 남지 않은, 회색빛 눈동자였다.

죽어가는 불빛처럼 탁했지만, 이상하게 섬뜩한 기운이 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사토루 선생님이시지요.”

“……뭐라고?”

“제가 보기엔,”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생활을 보아하니, 충분히 더 좋은 글을 쓰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놀라웠지만,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소름끼쳤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그때, 카운터에서 잔을 닦고 있던 사장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겁니다. 매일같이 오셔서 술 드시며,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큰소리치는 손님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 아이가 모를 리가 있나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지.”

잔속의 술이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여전히 내 머릿속 어딘가를 쑤셨다.


“사실은,”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책의 작가인 후지키 선생님을… 부러워하시는 게 아니신지요.일종의 질투랄까요.”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죄었다.

뼈마디가 안쪽에서 서서히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그저 내 속을 낱낱이 읽는 사람처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을 읽을 때 숨이 막히는 건, 단지 문체가 답답해서일 뿐이다.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건, 우연일 뿐이다.

……그래, 우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끝이 떨렸다.

입 안이 마르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쿡쿡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

지금 이 여자의 입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 속은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에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사토루 선생님도 그리 하세요.”

결국 그녀의 한마디가, 오래 잠겨 있던 가시를 안쪽에서 비틀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평소처럼 비웃고 넘기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어렴풋이 나도 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나는 후지키와는 다르다고,

인간을 모르는 내가 오히려 조금은 더 인간적이라고 후지키를 폄하하다니.

그러면서도 내가 조금 더 인간적이라는 믿음 하나로 겨우 버텨왔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얼마 전의 그 밤 이후로, 나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으면, 문장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스미노의 그림자와, 아내의 숨이었다.

무엇이 더 고통스러웠는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스미노 집에 더는 얹혀 살 수 없다는 곤궁 때문이었는지,

아내와 스미노가 저지른 일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이제 가정을 도덕으로 떠맡지 않아도 된다는

기묘한 해방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셋 사이를 빙빙 돌며,

끝내 내 속마음 하나 제대로 붙잡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나를 보고

그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토루 선생님. 오늘은… 우리 집에서 주무세요.”





표지.jpg 작가의 출간도서『세상에 없던 색』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



keyword
월, 수 연재
이전 10화인격자살(人格自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