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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자살(人格自殺)

두 번째 수기-2

by 추설

긴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책을 읽고 있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자꾸 눈에 밟혔다.

“뭘 읽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꾸조차 없었다.

이상하게도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때, 카운터 뒤에서 술잔을 닦던 사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포기하는 게 좋아요. 말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손님이 있을 때는 입을 아예 열 질 않아요.

그 아이가 예뻐서 그런 건진 몰라도,

괜히 몇 번 말 걸었다가 화만 내고 돌아간 손님이 꽤 있죠.”

사장 젖은 술잔을 천으로 닦으며 말을 끝냈다.

나는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책장이 천천히 넘어갔다.

그 조용한 소리가, 이상하게도 내 귓속에서만 울리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손님들은 모두 귀가했고,

나도 일어서며 말했다.

“사장, 외상으로 달아줘. 이번 원고는 느낌이 좋아.”

사장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뭐, 돈이야 언제 주셔도 상관없지만... 괜찮겠어요?

사모님이 찾아오셨어요. 집에 고지서가 꽤 밀린 듯하더군요.

무엇보다, 건강이 염려돼요. 담배도 좀 줄이시고, 술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사장, 그냥 외상으로 달아둬.”

사장 잠시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그의 말투엔 늘 변함없는 미소가 배어 있었지만,

그날따라 그 미소가 유난히 공허하게 보였다.


이 무렵, 나는 대학 동기 스미노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그는 독신이었고, 글만 쓰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왔어.”

그가 문을 열며 말했다.

“응, 왔구나. 또 술에 절어 왔네. 와이프한테 전화 좀 해.

우편이 얼마나 오는지 알아?”

“그냥 무시해도 돼.”

스미노는 한숨을 쉬었다.

“사토루, 집엔 한 번쯤은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나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잖아.

너 애들이 크는 건 봐야지.”

그 말이 왜 그리 거슬렸을까.

나는 괜히 화가 나, 스스로도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신경 꺼! 너나 가족도 없이 한가하게 글이나 쓰는 주제에, 책임이 뭔지 알기나 해?"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스미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 한 잔을 내 앞에 두고,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잔에 담긴 물은 유난히 맑았다. 그 투명함이, 왠지 내 속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서늘한 기운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창가 쪽을 향해 누웠다.

“젠장,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한심해라.”

입술이 바짝 말랐다.

잠이 들 때까지, 창문 너머의 가로등 불빛이 천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다음날 저녁에야 눈이 떠졌다.

스미노는 어딘가로 나간 듯, 집엔 없었다.

나는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어머니.

보내주신 돈이 다 떨어져서요. 집에 밀린 관리비가 좀 있어서…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돼요.”

우리 집은 다행히 지역에서는 이름 있는 상류층이었다.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대학 시절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로는 홀로 벌어가겠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물론, 실상은 달랐다.

이따금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이렇게 손을 벌리고,

그 돈은 늘 술값과 담뱃값, 그리고 도박으로 사라졌다.


뭐, 그게 어떻단 말인가.

사람을 속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부모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속인다.

애초에 나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내가 인(仁)이니 예(禮)니 의(義)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닌가.


그래도 어머니께서 돈을 보내주시니, 한결 여유가 조금은 생기며 가족이 있는 집에서

하루쯤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표지.jpg 작가의 첫 출간도서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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