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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자살(人格自殺)

두 번째 수기-3

by 추설

집 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세제 냄새와 오래된 나무 바닥의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한때 나의 것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낯선 냄새였다.

현관엔 신발이 두 켤레 있었다.

하나는 아내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낯익은 형태였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 어딘가가 서서히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몇 초쯤 지나서야 그 신발이 누구의 것인지 떠올랐다.

스미노.

방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찰음,

누군가의 숨결이 벽을 타고 번져 나왔다.

그 소리들은 너무나 익숙했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불빛이 바닥에 길게 번졌고,

그 빛이 내 그림자를 두 갈래로 찢었다.

그날, 나는 알았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은

죽음도, 배신도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타인이 차지한 그 순간이다.


집을 나온 뒤로 한동안 방황했다.

당장 스미노의 집에서 짐을 옮겨오는 일조차 고역이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낡은 원고 몇 장,

빨지도 않은 옷가지,

그리고 끝까지 마시지 못한 술 한 병뿐이었다.

며칠은 역 근처 여인숙에서 지냈다.

방엔 창문도 없었고, 불빛은 하루 종일 노랗게 깜빡거렸다.

밤이면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구토 소리가 들렸고,

그게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와 겹쳐졌다.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게 편했다.

생각을 끊어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나는 복잡한 생각을 모두 지워버리기로 했다.

스미노도, 아내도, 아이들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날 밤, 다시 여인숙에서 혼자 먹은 술에 취해 늘 가던 그 술집으로 향했다.

낡은 간판 밑으로 떨어지는 불빛이 이전보다 희미했다.

문을 열자 담배 연기와 낡은 가죽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카운터엔 사장이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는 걸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살아 있었군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죽으려 해도 돈이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그 말에 사장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있었다.

그때 그, 긴 머리의 여자.

이번에도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빛바랜 조명 아래서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 종이 넘기는 소리가 또다시 내 귓속을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봐, 오늘은 대답 좀 해줘.”

그녀의 손이 멈췄다.

한 장 넘기던 페이지가 공중에서 멈춘 채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기억보다 훨씬 차가웠고,

어딘가 슬펐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세상이 완전히 끝나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은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잠시나마 위안처럼 느껴졌다.


사장이 입을 열었다.
“손님도 참, 열심히 시군요.”

“사장, 담배 하나만 빌려줘.”

그는 피식 웃었다.
손에 쥔 담배를 하나 꺼내더니 불쑥 내밀었다.
“외상으로 달아두겠습니다.”

그 말투엔 장난기보다, 오래된 체념이 섞여 있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의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온 세상이 조금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시던가.”

나는 짧게 답하고, 허공으로 연기를 뿜었다.
그 연기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긴 머리, 희미한 조명 아래 고개를 숙인 얼굴,
그리고 책장을 넘기던 하얀 손끝.

“뭐, 대답이 싫으면 듣기나 해 봐.”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내 말을 자극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책 누가 쓴 건지나 알까, 너.”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책장 한 장이 천천히 넘어갔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귓속을 때렸다.

“그거, 누가 쓴 지나 알고 있나? 내 대학 선배가 쓴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놈이 어떤 놈인 줄이나 알아?

이 여자 저 여자 옮겨 다니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 관계를 죄다 글감으로 써먹는 놈이야.”

나는 잔을 비우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지금 저 책에 실린 그 문장들도, 다 그 녀석이 버리고 떠난 여자들의 잔재일 거야.

사랑을 가장한 관음, 위로를 가장한 도살이지.”

화가 났다.

“대학 시절엔 맨날 나한테 돈 빌려가던 놈이었는데,

이젠 기자들 앞에서 입을 열기만 하면 떠들어.

‘문학이란 건 인간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하, 개소리지. 인간을 이해하긴, 본인이 인간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녀를 향해 비죽 웃었다.

“결국 그놈도 글을 쓴다는 핑계로 사람을 갉아먹는 괴물일 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허공을 떠다녔다.

“아니지…”

나는 중얼거렸다.

“지금도 빌어먹고 사는 내가, 감히 위대한 대문호님한테 그게 할 소린가. 하! 참 한심하군. 나라는 인간은…빌어먹을”

그때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드러났다.

무표정한 얼굴에, 묘하게 차가운 기색이 번졌다.

“그럼,”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도 그러시지요.”

그 말은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처럼 소름돋게

내 안을 긁어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작가의 첫 출간도서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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