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격자살(人格自殺)

첫번째 수기-2

by 추설

열일곱 살, 나는 지역에서 제법 이름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갈 때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다만 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겪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괜히 어른 흉내를 내거나, 담배 냄새 섞인 농담으로 하루를 보냈다.

남학생들은 제법 키가 컸고, 여학생들은 단정한 머리 사이로 향수를 뿌렸다.

학교라는 공간이 바뀌자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과장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또 다른 권력의 층위에 발을 들였다.

지역에서도 이름난 사진부에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나는 ‘노력’보다는 ‘감각’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사진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학교 내내 반장을 맡으며, 행사 때마다 억지로 무대에 올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면 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는 카메라였지만,

렌즈 너머의 세상에서는 손끝이 자연스러웠다.

누군가의 얼굴, 그 표정, 잠깐의 움직임까지도 내 마음대로 가둘 수 있었다.

그 감각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본능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재능이라는 또 다른 권력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사진부는 그 본능을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무대였다.

봄 축제의 전시회가 끝난 뒤, 아무도 관심 없던 나에게 기대가 쏟아졌다.

신문부 기자들이 찾아와 내 사진을 실었고,

누군가는 나에게 인화법을 배우고 싶다며 다가왔다.

유치했지만, 재능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나는 그 감각에 목이 말랐다.

결국 근처 예술학교로 전학을 갔다.

거기서 나는 상이란 상은 모두 받았고, 전국학생사진전에서도 입상했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사건을 목격한 뒤, 다시 원래 학교로 돌아왔다.

(그 사건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돌아온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유치한 소문이 돌았다.

예술학교에서 상을 휩쓸고 흥미를 잃어 돌아왔다는 이야기.

스승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

한 친구가 내 사진을 보고 자살했다는 이야기.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카메라에 대한 흥미가 식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었기에, 다시 사진부로 돌아갔다.

3학년.

보통은 활동을 마무리할 시기였지만, 학교는 전국대회 출품을 이유로

마지막까지 남으라 했다.

그렇게 나는 곧 사진부의 부장(部長) 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없는 사이 부서는 변해 있었다.

1학년 때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얻었던 끈끈함은 사라졌다.

서로를 불신하는 눈빛이 가득했고,

모두가 파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나와 가장 친했던, 실력으로는 나 다음이라 불리던 친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점심도 따로 먹어?”

그는 학교 1층 매점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없는 동안, 별별 일이 다 있었지. 특히 2학년 때.

전시 준비할 때마다 누가 중앙에 사진을 걸지로 눈치 보고,

현상실에서는 필름이 자주 사라졌어.

겉으론 웃으면서도 뒤에선 욕하고, 험담이 난무했지.”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놀랍진 않았다.

그러나 다음 말이 내 귀를 멈추게 했다.

“그보다 문제는 너야. 넌 2학년 내내 학교에도 없었잖아.

예술학교에서 상을 휩쓸었다는 얘기까지 돌았는데,

그런 네가 갑자기 복귀해서 부장이 됐다?

아무리 선생님이 세웠다지만, 그걸 네가 받으면 어떡해?”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파멸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질투라는 건 사소한 균열처럼 보이지만,

한 번 스며들면 걷잡을 수 없다.

얇은 유리에 생긴 미세한 금이 결국 산산이 부서지듯이.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내가 없는 동안, 2학년 부장은 누구였어?”

친구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였어. 네가 없었다면, 그대로 내가 3학년 부장이 됐겠지.

내 구상대로 전시를 열고, 입상 확률도 높아졌을 거고.”

그의 눈빛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며 말했다.

“나는 네가 하려던 모든 걸 이미 2학년 때 끝냈어.

다른 애들도 상을 타려면, 네가 아니라 내가 더 낫다고 생각했겠지.

선생님도 그걸 알았으니 부장을 나한테 맡긴 거고.

너는 내 밑에서 조용히 이름이나 남겨. …안 본 사이에 많이 추해졌네.”

그 친구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소리를 지르며 현상실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은 따로 없었다.

압도적인 재능과 실력,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날 밤, 필름을 감으며 문득 생각했다.

정말로 그것뿐이었을까.

내가 찍은 모든 얼굴 뒤에는, 내가 모르는 감정이 있었다.

웃음과 눈물, 불안과 사랑.

그들은 모두 내 렌즈 안에서 멈췄지만, 나는 그 속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처음 자각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표지.jpg '추설' 첫 출간 작품 『세상에 없던 색』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


keyword
월, 수 연재
이전 04화연재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