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갑자기 주방 서랍정리를 했다. 무슨 계기나 정리해야지! 하는 결심이 있었던 게 아닌데 주방에서 가장 정리가 안된 싱크대 맞은편, 아일랜드식탁 아래 서랍을 싸악 정리해 버렸다. 그 서랍은 깊으면서 허리를 숙여야만 안을 볼 수 있어 물건이 한번 들어가면 잊히는 블랙홀이었다. 서랍 안 한쪽은 플라스틱 보관용기가, 또 한쪽엔 잡동사니들이 함께 한 세월 동안 마구잡이로 쌓여있었다.
단출한 세 식구라 살림살이가 많지 않아서 맘먹고 치우면 나름대로 깔끔한 집이다. 하지만 그 서랍만은 열면 플라스틱 보관용기가 우수수 굴러 떨어져 여는 것이 금지된 곳이었다.
이런 서랍의 봉인을 푼 것이다.
우선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다 꺼냈다. 깊숙한 곳에서 아이 유치원 때 숙제장까지 나왔다(지금 아이는 초5이다) 일러스트가 예뻐 버리지 못한 한참 연도가 지난 달력도 쓰레기 봉지에 담고 철 지난 카탈로그들도 버렸다. 왜 안 버리고 모아 놨던 건지..
아기 때 쓰던 빨대컵부터 누구 집에나 있는 본죽 플라스틱 통, 오래돼서 안 쓸법한 통, 뚜껑이 없는 통까지 과감하게 버렸다.
크기에 맞게 착착 정리하고 안 쓰는 건 버리고 나니 서랍 안이 훨씬 넓게 쓰이고 깔끔해졌다.
"여기 서랍 열어봐"
"오~웬일이래? 거기 서랍은 자꾸 물건이 떨어져서 안 열게 되는데 잘했어!!"
뿌듯한 마음에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열어보라며 자랑을 했다.
집이 깔끔해 보이려면 일단 위에 나와있는 것들을 치우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들도 정리해야 진정한 집정리가 된다.
눈에 보이는 곳만 청소하고 안의 서랍은 엉망진창인 채로 있으면 남들이 보기엔 부지런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쩌면 나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지만 나 자신은 결코 나에게 속지 않는다. 마음 한편에서 어수선한 서랍이 존재한다는 것. 깊숙한 곳에 미련하게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이 썩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한결 깔끔해진 주방을 보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마음이 편안해야 몸이 건강하듯이 보이지 않는 서랍 안을 정리한 것뿐인데 식탁 위나 싱크대위에도 깨끗하게 치우게 되었다.
정돈된 공간에서 지내니 내 일상도 예쁘게 꾸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플레이팅도 예쁘게 했다. 그 공간에 어울리게 나 혼자 먹더라도 손님 올 때만 꺼내는 예쁜 접시를 꺼내 먹었다. 내가 나를 대접하는 기분. 티브이에 연예인들이 집에서도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먹는 걸 보고 '카메라로 찍고 있으니 저러지 누가 집에서 혼자 먹는데 저렇게 하고 먹냐?'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마음이 변하면 행동도 변하게 된다. 조금의 변화로도 평범한 일상이 변할 수 있다. 한강뷰나 탁 트인 널따란 거실이 있는 집이 아니지만 내 공간에 만족하며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더불어 그 공간에서 지내는 시간들도 예쁘고 소중하게 지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