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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혜 Aug 02. 2023

오후의 여행자

서울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오전에는 J로 오후에는 P로 살기


나의 MBTI는 INFP다. MBTI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울러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도구라 생각한다. 


  INFP의 사람들은 내향적, 직관적, 감정적, 인식적 성향을 지녔다.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선호하며 돌발 상황에도 순발력 있게 대처한다. 반면 조직적이고 정확성과 계획성이 요구되는 업무에는 서툰 편이다.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는 일에는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세무 관련 신고라든가, 사용 설명서를 읽고 기계를 조작하는 일에는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잘하는 일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서툰 일도 씩씩하게 해낼 수 있어야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나는 하루를 반으로 나누어 살기로 했다. 오전에는 J로 오후에는 P로 살기. MBTI에서 J는 판단형이고 P는 인식형이다. J성향의 사람들은 P성향의 사람들보다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P인 나는 그래서인지 '일단'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일단 해보자. 일단 가보자. 일단 먹어보자. 일단 만나보자!! 철저히 계획을 세운 뒤 여행을 떠나거나 일을 시작하기보다 느슨한 계획을 갖고서 일단 시작한 뒤 수정하거나 구체화해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가령 내가 서퍼라면 파도를 잘 타는 것은 내 소관이지만 파도의 세기와 높낮이 등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산다는 건 마치 이 파도를 타는 것과 같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일들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완벽한 계획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예측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큰 틀의 계획을 갖고서 바다로 나가 부딪쳐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파도를 타다 보면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토대로 내가 잘 탈 수 있는 파도가 무엇인지 몸의 감각으로 익혀나가는 것이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 집중력이 선명하고 체력이 좋은 오전에는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처리한다. 주로 먹고사는데 필요한 일들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고생한? 나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준다. 생각과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오후의 여유를 유영한다. 이 루틴을 나는 '오후의 여행자'라 부른다. 

 

공간이 아닌 시간을 여행하는 방법


 언젠가 도쿄를 여행할 때 이른 저녁 숙소 주변을 산책 중이었다. 좋아하는 타코야키가 써붙여진 선술집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그리 맛있는 집이 아닐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바스타일의 좌석에 주인장과 30대 회사원으로 보이는 단골손님이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가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있었기에 그냥 이곳의 타코야키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사장님에게 손짓 눈짓 발짓?을 동원해 타코야키와 생맥주를 주문하고 옆에 앉은 단골손님과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일어를 할 줄 모르지만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어 주인장 위로 걸려 있는 작은 아날로그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졌고 그 뒤로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옆에 앉은 손님이 그 상황을 더듬더듬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나리타 공항이 주거지와 지나치게 가까워 주민들이 비행기 소음으로 겪고 있는 불편을 호소하는 보도라 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타코야키는 예상대로 한국 길거리에서 먹는 맛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맛이었다. 그러나 아쉽기보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 싶어 내적 웃음이 났다. 맛있고 유명한 그래서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식당을 찾아가 볼 수도 있었겠지만 마치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낯선 이들의 일상에 슬쩍 끼어든 여행의 순간도 나쁘지 않았다. 낯설고 엉뚱한 도쿄의 밤이었다. 여행은 흔히들 장소의 이동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를 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을 벗어나 다른 결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생 타코야키는 먹지 못했지만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꼭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여행자가 될 수 있다. 늘 다니던 길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도 뒷골목 낯선 풍경에 심장이 뛴다. 우연에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시작된다. 때론 동네 산책을, 가끔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낯선 동네나 도시로 발걸음을 향하는 날도 있다. 카페에 앉아 책 속 글자의 숲을 거니는 오후도 있고 느긋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요리를 하는 오후도 있다. 그렇게 일상의 틈으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 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가 찾아왔다. 핸드폰 비행기 모드를 켜듯 몸과 마음을 여행자 모드를 전환한다. 오늘도 나는 일상을 여행한다. 


골목골목 걸으며 옛 느낌 물씬 오래된 가게를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산책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 


 

 여름밤 동네 친구와 산책 후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 그것이 또 여행

    

 오후의 고양이처럼 게을러도 좋은 나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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