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감이 심한 환경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편이다? 비동의
자산운용사에 바로 정규직으로 입사한 것은 아니다.
팀의 전환형 인턴직에는 나 포함 2명의 사람이 뽑혔고, 2개월 동안의 수습 기간을 통해 정규직 전환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애초 계획으로는 한 명만 뽑으려 했으나 두 명이 마음에 들었고, 아무도 전환이 되지 않을수도, 2명 다 전환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후자는 인건비 절감을 생각했을 때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지만, 그 때는 그 상황 안에 있는 당사자로서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중요한 것은 2명 중 내가 뽑히는 일이었다. 만약 2개월 끝에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자소서 남발을 시작해야 한다면? 왜 안 뽑혔지, 면접에서 뭘 잘못 대답했지, 왜 이렇게 살았지 끝나지 않는 후회의 회전목마에 다시 올라타야 한다면? 끔찍했다. MBTI 테스트 질문 중 하나인 '압박감이 심한 환경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편이다'에 나는 (완전) 비동의를 누르는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상대가 이미 자산운용사에서 1년 정도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너무 불안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이게도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쟁 관계 그 자체였다. 상대방은 동년배의 서글서글한 인상과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사람과의 관계 또한 서로 어쩔 수 없는 경쟁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인정하는 괜찮은 사이였다. 직장생활이 처음인 나의 서투름을 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하고 인정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제일 최악이었다. 차라리 1대 다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 때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은 핏기도 영혼도 없다며 진심으로 날 걱정했고, 보지 않아도 얼굴 표정이 보일 정도였는지 간혹 잡히는 약속에 친구들은 무조건 나의 직장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그 때는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에서 출근을 했고,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다가 취직할 나이가 되자 지방으로 떠나신 부모님의 행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 집안 사정이 좋았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더니, 출퇴근 길에 이미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회사에서도 상사들 문장 하나 표정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집에 와서는 무엇을 할 새도 없이 바나나를 먹다 스르르 잠드는 생활에 육체적, 정신적 소멸을 느껴가던 나는 근방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등학교 친구를 떠올렸다.
가끔 재워줄 수 있어?
이 부탁을 했던 때를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정말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신세지거나 부탁하는 것을 못하는 사람으로서,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그런 부탁은 안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뗄 수 밖에 없을만큼 그 때는 지쳐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자기도 하고 쭉 인연을 이어온 친구였지만, 가장 편해야 할 집에서 말이나 행동을 신경써야 할 사람이 생긴다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모두가 분주한 아침시간 화장실을 써야 하는 사람이 한 명 추가된다는 건 마음의 준비를 해도 그 예상보다 더 불편한 일이다. 친구 어머니의 얼굴에 그 불편함의 내색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친구가 나 이후 누군가 자고가는 건 안된다고 부모님이 선언하셨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조차 난 다시 돌아가도 그 부탁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사리분별이 안됐고, 스스로를 살리기 위한 사리분별만 했다.
인턴 자리를 가리기 위한 마지막 과제가 주어졌다. 투자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수업을 배웠던 강사님께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리서치와 투자 논리의 방향성을 잡았다. 자료발표 하루 전 나와 또다른 인턴은 함께 밤을 샜는데, 허리가 아프다며 회의실 책상에 대자로 누워 잠을 자던 그 모습이 그 새벽에 왜 그렇게 웃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만들 수 있는 최대의 선에서 완성한 각자의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마쳤고, 서로를 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나는 그를 따로 불러내 붙잡고 약 30분 동안 주저리주저리 함께 했던 소회를 모조리 풀어냈다.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이기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스토랑 테라스 자리를 통째로 대관해 모두가 어느정도 취하고, 담배나 이야기를 핑계로 1층을 왔다갔다하며 정신없어지는 특유의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자, 팀장님이 나를 불러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