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행한 명제는 왜 참인 건지
정규직이 된 후 약 6개월이 지났다.
6개월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뛰어넘은 이유는 그 이후 생긴 일들에 비해 너무나 행복하기까지 했던 나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6시에 자리에 안 계신 전무님을 제외한 차장님, 팀장님 즉 팀원 모두가 야근을 위해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초록 불을 본 아이마냥 손을 들고 "전 퇴근하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든지, SNL MZ오피스의 맑눈광 캐릭터마냥 이어폰을 끼고 일한다든지 등 이 모든 일이 사소한 해프닝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이를 사소한 웃음으로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팀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일련의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전무와 팀장이 팀을 이루어 다른 회사로 떠났고, 남겨진 차장과 나는 마침 꾸려진 지 얼마 안 돼 헤드 2명만 있던 옆 투자2팀으로 합쳐졌다. 서로에게 날벼락이었다. 괜히 금융은 인맥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이, 소수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팀 단위로 성과를 내고 인센티브를 공유하는 시스템 속에서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에 신중함을 기할 수밖에 없다. 이 신중함이란 본인과 인연이 있거나 적어도 본인의 손으로 직접 뽑은 팀원이라는 사실을 통해 생기는 어떠한 책임감이나 애틋함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물론 이 모든 감정들은 인센티브 분배 결과에 따라 한순간에 박살 나기도 하지만 때까진 팀을 굴러가게 하는 근본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퍼즐판의 퍼즐로 시작한 상황에서, 본인을 깎아 맞출 만큼 새로운 팀이 가치 있는 퍼즐판인 고민하던 차장은 약 2개월 후에 퇴사 통보를 했다. 본인이 추구하는 투자방향과 다르고, 7~8년의 경력을 뒤로한 채 새로운 업무를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 함께 가기 어려운 성격의 헤드들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서로의 업무 스타일을 잘 모르던 초반 상무는 차장을 불러 이메일로 전달된 투자 분석 결과보고에 대해 소위 말하는 군대식으로 화를 냈다. 우리 팀을 포함한 회사 인원 모두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던 상태였고, 상무의 자리는 회사 한가운데였다.
"야, OOO. 너 장난하냐?"
"아닙니다."
"지금 이걸 보고라고 이메일로 보냈냐? 네 그러고도 차장이라고 할 수 있어? 이건 주임 시켜도 해. 이럴거면 내가 OO(내 이름)이 시켰지 장난치냐고!"
"죄송합니다."
나와 상무 자리는 벽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기에 내가 힐끗 볼 수 있는 것은 차장님의 무덤덤한 표정뿐이었지만, 이 모든 순간을 목격한 옆 팀의 IB 주임은 차장님이 정말 군대처럼 다리를 벌리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차장님은 자리로 돌아와 약 30분 동안 멍하니 꺼진 화면만 바라봤다. 그때였다. 그의 결심이 확고해진 것은. 이건 누가 봐도 '나는 너희가 꼴보기 싫으니 내 밑에 더 바짝 엎드리거나 꺼져' 시그널이었다. 후에 새로 영입한 팀장이 똑같은 방식으로 이메일 보고를 했을 때, 상무가 그 누구보다 온화한 얼굴로 그에게 가 이런 부분을 보충해줬으면 좋겠다고 '대화'한 순간을 차장님이 목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빠른 판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다음 날 나와 점심을 먹으며 1주일 내로 퇴사 통보를 할 것이라는 얘기를 했고, 나는 그동안 함께해서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백 번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지만 이미 그가 많이 버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전 팀의 전무가 나간 후 가장 믿고 따랐던 팀장이 남아있을지 전전긍긍하며 보냈던 한 달, 팀장이 나간 후 차장에게 똑같은 마음으로 보냈던 한 달로 인해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지쳐가며 초연해져갔다. 행복했던 순간은 짧아야 맞는 건데 내가 당연한 명제를 바꿔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간과한 명제가 있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때 나는 차장을 따라 이 명제를 착실히 따라야 했다. 이제 전 팀에서 건너온, 치워버려야 할 깍두기는 세상 만만한 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