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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기의 시간

by 사색의 시간

돌기는 빙 둘러서 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뾰족하게 도드라진 것을 뜻하기도 한다. 2017년 3월, 계약 만료로 직장을 잃었다. 반듯한 회색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돌기가 된 것이다. 아쉽고 야속한 마음도 있었지만 후련했다. 이 참에 자전거 여행을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창 자전거를 좋아하던 시기였다.

유럽을 가볼까. 너무 멀고 겁이 났다. 겁쟁이에 길치인 사람이 혼자서 자전거 여행을 하기엔 어디가 적합할까. 지도를 살펴보다 타이완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완 섬 면적은 한국의 1/3 정도이다. 섬이니까 바다를 끼고 페달을 밟다 보면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 섬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환도 자전거길’도 있다고 하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깝기도 하고 중국어도 조금 할 수 있어서 타이완에 가기로 했다. ‘섬 한 바퀴’가 가져다주는 완결성도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회사 밖으로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나온 나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 보고 싶었다.


타이완은 황량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인지 인적이 없는 루트만 골라 다닌 것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드물었다. 자전거 천국을 상상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냐고 묻자 ‘우린 오토바이 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타이완 도로에는 이륜 차선이 따로 있다. 그 길을 혼자 달리거나, 오토바이 떼 속에서 달렸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따금 창밖으로 손을 뻗어 힘내! 하고 외쳐주었다. 처음에는 그 소리에도 깜짝 놀랄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다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다시 달린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종일 반복되는 움직임 사이로 이런저런 상념들이 올라왔다. 한국에서는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던 것들이 많았다. 회사생활이나 사적인 관계에서 미처 추스르지 못했거나 괜찮은 척 넘어갔던 것들. 타이완을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그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가슴 위로 돌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타이완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가슴속에 돋아나는 돌기를 살펴보는 것은 여행의 주요 일과였다.


여행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 좋은 시간이다. 자전거 여행은 더 그렇다. 관광지나 특별한 볼거리에 정신을 팔리지 않고 오롯이 안장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점 때문에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전거만 타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럴 거면 한국에서 타지 왜 꼭 외국까지 가서 타는 거야?라는 질문도 받았다. 자전거란 본디 앞으로 나가는 성질을 지닌 물건이다. 새로운 곳을 달리는 것이 자전거의 본능이다. 관광명소나 유명 맛집에 가지 않았더라도 자전거로 달려본 곳이라면 내게 더없이 멋진 여행지로 기억된다. 언제나 바람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는 나의 온몸을 바람이 감싼다. 앞으로 나갈 때마다 바람이 그 장소에 관한 모든 장면을 내 몸에 입혀준다. 길 가에서 팔던 딸기 한 바구니, 유난히 모래가 많아 바퀴가 미끄러지던 해안 도로. 자전거 위에서 만난 것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오래도록 남는다.

2018년 2월, 타이완을 돌고 온 지 1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그때의 여행기를 새로 써보고 싶어 졌다. 돌기의 시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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