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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달래기

by 사색의 시간

매일매일 순간순간, 나약한 나와 대면한다. 한국에서와 다를 것이 없구만.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뿐인데도 몸짓은 무척 힘겹다. 타이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힘들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바짝 쫄아버린 뒤로 줄곧 이 상태다. 침대에 널부러져 한참 동안 진지하게, 자전거 여행을 포기할까 고민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랬었지 쓴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럼 그렇지. 역시 침대 밖은 위험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야. 쉽게 겁먹고 쉽게 약해지고 쉽게 극단적인 결정을 내려버린다. 그리고 이것들은 쉽게 만들어졌듯이 쉽게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에서, 타이완 곳곳에서 받았던 응원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사실은 계속 달리고 싶잖아. 그렇지? 자전거를 다 분해해서 박스에 넣는 것보다 지금 이 상태로 타고 가는 게 더 편하잖아. 일단 달려보자. 가다가 진짜 힘들면 더 이상 안 가도 되니까, 일단 가보자. 기차 타고 가도 되니까 기차역까지만이라도 가자. 필사적으로 나를 달랜다. 어르고 달랜 끝에 겨우겨우 호텔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햇살은 끝내주게 예뻤다. 봐봐, 날씨 좋지? 엉덩이가 안장에 닿을 때까지, 발끝이 페달에 닿을 때까지, 방심할 수 없다. 조심조심. 자전거에 올라탄다. 살살 밟아보자. 무슨 고민이든, 밟으면서 생각하자. 이 다음부터는 쉽다. 자전거가 알아서 해준다. 페달을 밟고 바람을 가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걸 잊고 실실 웃는 얼굴이 등장한다. 머리든 가슴이든 속이 상쾌해진다. 달래기 성공. 타이동을 향해 아주 잘 달리고 있습니다! 아니, 기차역을 향해, 랄까.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달리기만큼이나 자주, 혹은 오래, 스스로를 달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었다. 제발 부디 극단적이고 나약한 이 인간이 무사히 타이베이까지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매일 밤마다 몇 번씩 빌었는지 모르겠다. 할 수 없다거나 하기 싫다는 투정마저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의외로 금방 풀어졌다. 그 목소리가 원하는 것은 진짜 내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귀를 좀 기울여주는 것이었다. 그래 나 못하겠어 근데 사실은 하고 싶어. 진심은 그거였다. 달래 달라는 말이었다.


자전거가 오른쪽 왼쪽 페달을 밟아 나아간다는 점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페달을 밟다 보면 리듬이 생긴다. 그 규칙적인 리듬이 묘하게 안도감을 가져다 줄 때가 있다.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 대한 일들부터 어떨 때는 어릴 적 일들까지. 온갖 것들이 떠오르곤 했다. 어지럽고 심란한 것들이 반복되는 페달링, 반복되는 호흡과 함께 박자를 찾는 과정을 겪게 된다.


종일 자전거를 타고나서 피곤한 상태로 맞이하는 밤이 오면, 약해진 곳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오른쪽 무릎, 골절 수술을 받았던 왼쪽 쇄골, 내일도 무사히 달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처음에는 그것들을 달래는 법을 잘 몰랐다. 왜 달래줘야 되는 거냐고 생각했다. 앓으면 앓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랬더니 다음날 자전거를 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거구나. 어설프게나마 보듬고 추스르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알아갔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추진력이 있다던가 용감하다던가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게으르고 겁 많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 말이다. 어딘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흔치 않으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 일단 가보는 것. 무서워 죽겠지만 일단 자전거에 올라타 안장 위에서 무서워하는 것.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추진력이나 용기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스스로를 게으르고 나약하다고 나무랄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잘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안장 위로 오르는 법을 터득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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