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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에서 내려와 맨발로 서다

서른 아홉, 나와 춤추기 시작했다 2

by 사색의 시간 Jan 23. 2025

스물 다섯 살, 탱고를 시작했다.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 분명 스트레스가 많겠지. 취미생활 하나는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의 취미생활 찾기가 시작되었다. 발레, 검도, 수영, 헬스,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다. 한 달을 넘기는 것이 없었다. 원데이 클래스로 접한 탱고는 위태롭고 매혹적이었다. 이걸 배우고 싶어. 어느 것에도 정착하지 못하던 중, 마침내 마음 속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탱고를 추면서 치장에 눈을 떴다. 늘 맨얼굴에 츄리닝 차림이었던 내가 붉은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옆이 깊게 트인 스커트를 입고, 9cm 힐의 탱고슈즈를 신었다. 등이 훤히 드러나는 파티용 드레스를 주문하기도 했다. 조심스레 닿는 손가락, 지옥이라도 함께 할 것 처럼 맹렬한 반도네온 연주, 나무바닥이 긁히는 소리, 그 모든 것이 탱고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소리 없이 갈증이 커져가고 있었다. 탱고는 둘이서 추는 춤이었다. 둘이어서 좋았지만 둘이어서 허전했다. 상대가 없으면 나도 없었다. 대회를 나가보고 싶었지만, 파트너가 필요했다.      


‘혼자 추는 춤을 춰보고 싶어.’     

혼자 추는 춤 중에서도 벨리댄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탱고였다. 탱고 파티에서는 탱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춤을 접할 수 있다. 탱고 음악 사이 깜짝 이벤트로 살사음악이 흘러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멋있게 살사를 추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끈적한 블루스 공연이 펼쳐지는가 하면, 흥겨운 아르헨티나 민속춤이 플로어를 채우기도 했다. 홍콩 밀롱가(탱고를 추는 장소)에 갔다가 보게 된 벨리댄스 공연이 나를 사로잡았다. 온전히 홀로 서서 자신에게 집중한 채 움직이는 춤사위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서른 살, 나는 벨리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탱고를 출 때는 9cm 힐의 슈즈를 신어야 했지만, 벨리댄스를 출 때는 맨발이었다. 그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벨리댄스가 대지에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벨리댄스를 추며 상상 속에서 나는 제사장이 되고, 여신이 되었다.      


여행지에 가면 그 지역의 밀롱가를 찾아가보곤 했다. 벨리댄스를 배운 뒤로는 그 지역의 벨리댄스 워크샵을 검색하게 되었다. 멜버른에 머물렀을 때 신전같은 스튜디오에서 벨리댄스 수업을 듣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면 꼭 마무리 곡에 프리댄스를 추곤 했는데, 동그랗게 모여 저마다의 춤을 추는 것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다. 꼭 우리나라의 강강술래 같기도 했다.     


그 후로는 점차 춤을 잊어갔다. 나이가 들수록 춤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생계와 연결되지 않은 활동은 비생산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30대의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살아갔다. 어떻게 하면 자산을 더 늘릴 수 있을까 집착했다. 멋모르고 투자에 손을 댔고, 실패했다. 많은 것을 잃고 나니 웃기게도 다시 춤 생각이 났다. 


‘나에게 진짜 필요했던 건, 춤이 아니었을까.’     

서른 아홉, 나는 다시 맨발로 섰다. 모든 의미에서의 맨발이었다. 맨발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돈을 모으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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