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안긴 딸
"손쌤은 제주살이가 잘 맞나 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 보기 좋네."
"옛날엔 제가 많이 날카로웠지요?"
"뭐랄까, 평소엔 온화한데 누가 나를 건드린다 싶으면 고슴도치처럼 뾱!
다른 사람들은 화가 천천히 올라오는데, 손쌤은 그냥 단번에 뾱!"
"하하하하, 맞아, 맞아."
2023년 봄, 제주로 여행 온 옛 직장 동료의 말에 박수를 치며 웃었다.
삶을 이어가기로 결정한 후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번 돈이었다.
가족에게 손 벌리는 것이 아닌 내 힘으로 번 내 돈.
대학생 시절에는 캠퍼스의 낭만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친구들은 어딘가로 나아가는데 나는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었다.
"우리 딸, 평생 종일 근무는 못하고 살 줄 알았는데 오래 버티네."
첫 직장 6개월 차, 엄마의 말에 다소 억울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백수였던 나는 가족의 일을 돕거나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며 뒤늦게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
졸업 후 30대 초반에서야 학원 교사로 처음 직장이라고 부를만한 걸 가졌다.
고슴도치 같았던 나를 동료로 받아준 고마운 인연들을 거기서 만났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움과 사연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때부터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을 함께 하면서도 몰랐던 그녀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들의 인생은 나와 달리 희극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저마다의 비극을 품고 있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녀들은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다.
과거는 뒤로 하고, 아니 담담하게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닮고 싶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도 덩달아 언론에서 재조명되었다.
그때 아빠를 잃은 14살 아이가 아직 내 안에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노란 리본으로 바꿨던 직장 동료들은 리본을 내렸다.
그때도 지금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맙고 미안하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정신이 없는 나의 마음을 그들은 헤아려주었다.
상처 입은 동물처럼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악으로 버텼던 때가 있었다.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의 손길은 따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따뜻한 마음을 전하던 눈빛들을 기억한다.
소중한 인연의 온기로 얼어붙은 악이 조금씩 녹았다.
딸은 그렇게 세상이라는 바다로 한걸음을 내디뎠다.
(매주 목요일 밤 9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