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안긴 딸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너무 억울해.
스물여섯의 화창한 봄날,
밤이 오길 기다렸다 빌라 옥상에 올라갔다.
고요한 공기, 차분한 바람, 흐느끼는 마음.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힘없는 발은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
차마 놓지 못한 난간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누가 들을까 소리 없이 엉엉 울었다.
아빠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끄러워 너무 부끄러워 도저히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죄송해요, 아빠... 죄송해요."
누구의 생각일까. 순간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눈이 번뜩였다.
"내가 왜 죽어야 해? 내가 왜?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손으로 난간을 세게 움켜쥐었다.
도시의 깊은 밤처럼 마음도 이내 잠잠해졌다.
"한 달. 딱 한 달만 마음대로 살아보자.
어차피 죽을 거 그 후에 죽어도 늦지 않아."
어릴 때부터 모아둔 꽤 많은 돈을 다 썼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못난 애물단지 불효녀.
그런 죄책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무슨 상관이야? 될 대로 되라지."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온 가족이 갔던 바다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을까. 가슴이 뻥 뚫렸다. 후련하고 통쾌했다.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 눈치 없이 마음껏."
1993년 10월 10일.
아빠가 돌아가신 날부터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어린 나.
그 아이의 시계가 12년 만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딸은 2026년의 봄을 맞았다.
제주의 숲은 푸른 옷을 찾아가고 바다는 파랗게 빛난다.
청량한 숨을 가득 들이키고 아낌없이 내뱉는다.
아빠에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아빠와 또래가 된 내가 나에게 듬뿍 안긴다.
'사랑스러운 막내딸에게.'
아빠의 편지를 오랜만에 들춰본다.
나는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이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매주 목요일 밤 9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