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ongsunlee
Nov 02. 2024
6가 3번지
예전 국민학교 시절에는 신상기록부에 주소는 물론 본적을 기입하게 했다.
다른 곳에 이사를 가게 되어도 본적은 변함이 없어서 남영동의 주소는 잊었어도 본적인 영등포 6가 3번지는 잊을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작년 70세 기념으로 고국방문 때 60여 년이 지난 후 방문한 6가 3번지는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서울로 보면 강 건너 변두리로 칭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 영등포하면 약간 쳐진 느낌이 조금 남아있긴 하다.
서울이지만 시외로 연결되는 도시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다.
영등포시장과 로터리가 그런대로 번잡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 초가집이 곳곳에 있었고 여름밤이 되면 영보극장의 환한 불빛으로 인해 근처 논이나 숲에서 메뚜기가 날아와 극장 앞 환한 유리창에 무더기로 달려들어 쉽게 메뚜기를 잡을 수 있는 시골풍경도 곁들인 곳이다.
추운 겨울이 되면 사촌 형선형과 새깡에 설치된 간이 아이스링크에 가 잘 타지는 못하지만 즐거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사촌형은 씽씽 달려 내 앞에서 폼을 내면 나는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6가 3번지 할아버지 집은 하얀 타일 건물로 주상복합 형태다.
도로변 건물 정면에는 할아버지의 수산한의원이 자리하고 있고 왼편 코너에는 고모가 운영하는 활천약국이 있는데 그전에는 중국집 뺑이네가 있었던 자리이다.
신년이 되면 붉은 상자의 중국과자 월병을 선물해 그 특별한 맛의 추억이 남아있다.
한의원과 약국사이에 자리한 꽃집은 어머니가 일본에 가 계신 동안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려고 여신 가게다.
이렇게 건물 바깥쪽은 생계수단 지역이고 그 안쪽은 생활공간인 것이다.
한약재 냄새가 배어있는 어두컴컴한 약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미닫이 유리창문을 통해 맞은편 영등포시장 쪽을 쳐다보며 마른 트림을 하며 손님을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끔 그런 트림을 하시는 게 소화 기능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진료실 옆 조제실은 방 가운데 붇박이 테이블이 자리해 있고
그위에는 약재를 자르는 작두, 무게를 재는 저울과 약을 싸는 하얀 종이가 쌓여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에는 약재 명이 한자 붓글씨로 적혀있는 브라운색 봉지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조그마한 여닫이 북박이장이 있는데 붉은색 칠을한 문짝에 한자로 ‘독’ ‘극’이라 쓰여있어 그 속이 항상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를 돕는 귀성이형은 두 손을 비벼가며 염소똥 같은 환약을 만들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진료실은 따뜻한 온돌방이라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아랫목에서 한가한 낮잠을 즐기기도 했다.
한쪽벽을 차지하고 있는 약재 서랍함은 한자로 명기됐지만
계피와 숙지황, 시큼한 백반등 몇 개의 서랍은 알고 있어 군것질 대용으로도 즐기곤 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집에서 빈둥대는 나를 부르더니 함께 나가자고 하신다.
영문도 모르고 쫓아 나섰다. 제일은행 앞을 지나 그 시절 큰 건물 중에 하나인 하얀 회칠한 영등포 시립병원도 지나 푸라타나스 가로수가 길 따라 쭉 뻗어 심어있는 당산동까지 간 적이 있었다.
신작로라고 길은 넓게 닦아 놓았지만 자동차 한 대만 달려가면 뿌연 먼지를 일으키는 통에 지나가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며 팔로 얼굴을 가리고 가야만 했던 비포장도로였다.
행길가로는 쉬는 우마차의 달구지가 비스듬히 누워 나라비서 있고 보행자 도로 바닥은 알사탕 같은 푸라타나스 씨와 쇠똥이 즐비해 조심스레이 까치발로 걸으며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오던 길에 할아버지가 이사 간 뺑이네 중국집을 들려 공갈빵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으면서 왔던 추억 속에 할아버지와의 산책길이다.
여름방학이 되어 남영동집에서 할아버지집에 놀러 오면 제일은행 뒤편에 자리한 영등포공원 풀장이 오픈해 물놀이를 할 수 있었는데 수질이 안 좋아 던 지 눈병이 걸려 안대를 쓰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씩 공원에 서커스가 들어오면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 땅바닥에 깔아놓은 가마대기에 앉아 아슬아슬한 줄타기, 공중그네 타기, 원숭이쇼, 까랑까랑한 트럼펫 소리가 리드하는 악극단쇼, 신금을 울리며 슬프게 막이 내리는 단막극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고깔모자에 하얀 분칠과 커다란 빨간 코로 분장한 피에로의 코믹한 행동이 제일 웃기고 재미있었다.
약방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왼편으로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구멍가게가 있다. 처음에는 잡화를 팔고 여차장들에게 ( 바로 앞이 승합차 정거장 ) 라면도 끓여 주고 하다가 나중에는 꽃집으로 업종을 변경하기도 했다.
꽃집일을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병학이형이 들어와 도와주게 되다 보니 어벌이큰 어머니는 나중에 건물뒤 증축된 이층 건물 위에 온실을 만들어 각종 관상수를 사다가 키워 판매하기도 했다.
꽃집에서 안 채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검은색 마루가 깔린 안채 마루방이 있다.
이 방은 뒤뜰로 나갈 수 있는 미닫이 문과 활천약국으로 들어가는 좁은문이 있다.
하도 좁아 겨우 한 사람 다닐 정도다..
모든 사업장과 생활공간인 방들을 아우르는 공간 마루방이다.
이곳에서 2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신이라 5형제의 온 식구가 모여 잔치를 벌이는데 어머니와 고모님들은 식사준비를 하려고 다 부엌으로 갔고 아이들은 온방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여대생시절의 작은 고모가 아이들 모두를 마루방에 불러 모아 하시는 말이 내가 노래 하나를 가르쳐줄 테니 따라 해 보라 하며 가르쳐준 노래가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 저 맑은 햇빛이 온누리 비추니 우리는 항상 기쁘다.
내 비록 슬픔이 있을지라도 햇빛은 밝게 비추네.
오 나의 안식처일세 햇빛은 지지 않으리 내 비록 슬픔이 있을지라도 햇빛은 밝게 비추리. “
외국 민요로 그 시절 시중에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신선한 가사와 멜로디 이어서 모두가 배우고 함께 불렀던 노래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이다.
이 사건 또한 할아버지 잔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 편수’ 개성식 만두를 지칭하는 독특한 단어다.
잔치 하루 전 온 식구가 이 마루방에 모여 편수를 빚었는데 워낙 식구가 많아 수백 개를 빚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 편수는 평양식 만둣국이 아니라 어쩌면 중국식 물만두에 가까워 한 사람이 밥과 같이 먹는 게 아니라 편수만 먹기 때문에 10개 정도는 먹어야 했다.
그리고 어린 우리는 먹을 때 동그란 배추모양으로 빚은 편수를 다 으깨서 간장을 쳐서 먹으니 정성 들여 빚은 수고를 모른 체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하여간 밤늦게까지 빚어 교자상 두 개를 꽉 채워 신문지를 덮어놓고 모두 잠자리에 들어갔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 마루방에 나갔던 어머니가 놀란 기색으로 할머니에게 이르기를 그 많던 편수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두들 나와 의아한 얼굴로 이곳저곳 찾아보니 검정마룻바닥에 하얀 밀가루 흐미한 자국을 남기며 지나간 자국이 있어 쫓아갔더니 벽장구석에 산더미처럼 편수가 쌓여있었다.
발자국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쥐들의 발자국이 분명했다 께름칙하지만 잔치를 치러야 하니 물로 닦은 후 뜨거운 물에 푹푹 삶아 먹은 적이 있다.
마루방 옆 또 다른 작은 마루방은 양쪽에 미닫이 창문이 있었고 재봉틀 및 세간살이가 쌓여있는 곳이며 군대 갔던 삼촌이 휴가 나오면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 옆 건넌방은 부산 고모님네가 오시면 머물기도 했고 특히 나에게는 신비한 느낌이 있는 방이다.
막내고모가 아기를 난다 하여 한참 동안은 그 방에 접근을 금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그 방주의에 가면 약냄새 같기도 하고 달콤한 소독약 같은 냄새가 나 그 방이 더 궁금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그 방에 들어가 갓난아이 인호를 볼 수 있었다.
중간 마루방과 건넌방사이 골목을 지나 문을 열면 안방이다.
이 안방에 서린 몇 가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노할아버지가 생존하실 때 일이라 내 나이 4-5살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오신 후 옛날 축음기 크기의 릴 테이프 녹음기를 가져와 노할아버지의 육성 설교를 녹음을 하려고 할아버지를 비롯해 온 가족 남자들이 둘러앉아있는 가운데 노할아버지는 년로하셔서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아버지가 릴 테이프를 녹음기에 올려놓고 길 따라 기계에 끼어놓는 모습을 모두가 신기한 눈초리로 관람하고 이어 버튼을 눌러 돌아가니 긴장한 얼굴로 노할아버지는 준비한 설교를 시작하셨다.
그때는 너무 어려 무슨 말씀을 하시었는지 몰랐지만 그 이후 근래 카세트테이프로 이화춘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노할아버지를 뵌 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어린 동숙이가 무엇을 먹었는데 어딘가에 걸렸는지 얼굴이 파래지며 눈동자도 흰자만 남도록 돌아가 엄마는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에 간다고 나서니 이를 본 할아버지 가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신도 한의사인데 식구를 양의한테 보낸다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죽어가는 이 판에 무슨 자존심이 중요하냐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계속 울고 계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단호하셨다.
집일을 돕는 차선이 누나에게는 아궁이 불을 높이게 하고 할머니한테는 국방색 담요를 가져오게 하신 다음 동숙이를 담요로 칭칭 감아 싼 후 극약 캐비닛에서 가져온 수은 정량을 콧속에 부어 넣으시고 뜨거워진 아랫목에 담요로 싼 동숙이를 놓은 다음 다시 두꺼운 이불로 다시 덮어 뜨거운 열이 새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손과 다리로 눌렀다.
엄마는 이 무슨 희귀한 짓인가 하며 더 큰소리로 울고 계셨다.
이러하기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빵! 하는 소리와 함께 애 울음소리가 이불밑에서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이불과 담요를 걷어내고 어린 동숙이를 들어내니 치마밑에서 누런 방바닥으로 수은방울이 작은 방울 되어 쪼르르 흘러내렸다.
코로 들어갔던 수은이 항문으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결과적으로 보면 할아버지의 이 응급처치가 아니었다면 동숙의 운명도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의료기기가 한계가 있어 양의에게 갔어도 특별한 처치가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처치기법은 흔히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생수 페트병을 차에 놓고 내리면 뜨거워진 페트병이 팽창해 터질 듯이 빵빵해짐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이 현상을 이용해 사랑하는 손녀 동숙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안방은 향긋한 김냄새와 내가 할아버지 집에 온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방이다.
할머니의 밥상은 언제나 김향이 짙은 김을 구워 밥상에 올려 이쑤시개로 꽂아놓아 차려준다.
참기름이 반질반질해 반짝이는 김을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밥에 싸 먹으면 무슨 다른 반찬 없이도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향이 깊고 맛있었다. 사실 그 시절 김이 귀한 시절이기도 하다.
남영동에 살던 내가 이곳에 오면 잠자리를 펴주는 곳이 안방이었다.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우면 낮에는 인식 못했던 괘종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잠을 이루려 눈을 감아도 창문옆 시계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때로는 엄마 생각이나 한참을 뒤척이다가 숙면에 들곤 했다.
그래서 그 똑딱이는 초침소리를 들으면 아! 내가 지금 할아버지 집에 와있지 하며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잠이 드는 곳이었다.
본적: 영등포 6가 3번지.
본적을 원천이라 풀이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삶과 내 가족 형제들의 원천인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았고 그곳에서 기쁨과 슬픈 역사가 태동되었고
그곳이 역사의 큰 줄기의 강이 되어 여기저기 방방곡곡 지류를 넓혀가니 조상과 미래세대의 원천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작으나마 그들을 위해 본 적의 흔적을 남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