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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잊쑤 Nov 18. 2024

7월 : 2023년 여행, 혼자 가다 (5)

julio : 나의 안부를 걱정해 준다는 것은,

나의 핸드폰엔 5개의 알람이 설정되어 있었다.

am 5:25 / am 5:30 / am 5:35 / am 5:40 / am 6

대구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5개의 알람을 모두 꺼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대구에서의 첫 번째 아침,

나는 5시 30분에 눈을 떠버렸다.

알람 없이 9시까지 자는 것이 나의 목표였건만, 알람 없이 이렇게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내 심장을 강하게 쳐대는 소리 없이, 그저 고요한 적막함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만족스러웠다.


아직도 계획 없는 J형 인간


내 손에 '오늘 계획표'가 없다는 사실이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죄책감은 애써 무시하고, 오늘도 계획 없이 여행하기로 한다.


느지막이 11시에 호텔을 나선다. 첫 번째 행선지는 마제소바 가게이다.

안타깝게도 처음 먹어본 마제소바는 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위에 올려져 있는 돼지껍질 토핑을 안주삼아 하이볼 2잔만 가볍게 마시고 나왔다.


목적지 없이 이 골목 저 골목 거닐며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한옥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한옥 스타벅스가 대구에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여기 지금 내 눈앞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봤던 스타벅스와는 다른 분위기에 신이 나, 마구잡이로 쏘아다니다 이런 곳을 발견한 스스로가 참 기특했다. 

한옥 스타벅스임이 확연히 드러나는 자리에 앉아 셀카를 한가득 찍어, 일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잔뜩 보냈다.

친구들의 비난 섞인 카톡 답장들이 유달리 달콤하게 느껴졌다.

평소 절대 먹지 않는 휘핑크림을 올린 음료를 마셔서 그런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끈적끈적한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재생한다.

정신 차려보니 영화는 끝나있고, 어느덧 오후 7시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


1년 동안 노량진에 있는 공무원 기숙 학원에서 생활을 했다. 그때 친해진 언니와 만나기로 했다.

1년 반 만에 만나는 언니와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웃고 떠드느냐 바빴다. 언니는 여전히 여성스러우면서도 웃기는, 그 상반된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잘 지냈어?"


언니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울컥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는 척하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벌었다.

언니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시간을 보낸 후, 고요한 호텔방에 들어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저 평범한 4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에 나는 울컥한 것일까?


내가 계속된 실패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내 표정과 행동을 통해 나의 안부를 추측한다. 나의 표정에 우울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제야 나에게 가벼운 말들을 한가득 쏟아냈다. 하지만 나의 행동에서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면 다들 입을 닫거나 무거운 말들을 조금씩 한다.

나에게 이런 배려를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이 배려가 참 고마우면서도 때론 나를 힘들게 했다.


언니도 나의 지금까지의 일련의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언니는 나에게 안부를 묻는 말을 툭 던졌다. 그래서 나도 정말 솔직하게 나의 마음 상태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배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실된 나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저 멀리 대구에서도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동이면서도,

괜찮은 척하며 꽁꽁 숨겨 두었던 나의 마음을 꺼내어도 된다는 위로의 말이기에 한없이 고마워서,

울컥했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 호텔 창문으로 스며들어온 대구의 밤빛들이 너무도 일렁거려서

한참 눈을 꼭 감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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