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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드림 Apr 08. 2024

직장인 1막, 취업은 쉬웠지만 버티기는 힘들었다.




한 때 업계 관계자가 아닌 친구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냐’였다. 학창시절 연극반과 극단에 몸 담으면서 연극이 좋았고 연극연출을 하고 싶었는데 돈을 많이 벌 것 같지는 않았다. 배고픈 예술을 하기에는 그때도 지금도 어리고 속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배우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이 업계에 발을 들여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겠는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매니지먼트를 가르치는 과도 없었고 여자 매니저는 지금보다 더 귀했다.



그러다 대학을 가고 나니 더욱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21살에 학교를 뛰쳐나와서 당시 유행하던 학원형 기획사의 에이전시에서도 일을 했었고, 공연 기획사에 들어가서 콘서트 기획 막내로도 잠깐 일했다. 내가 입사한 후 얼마 안 돼서 회사 사정이 나빠지며 나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는데 그때 떠오른 것이 영화관 스태프였다.



당시에 나는 개봉하는 영화마다 섭렵하고, 주말의 명화를 끼고 살고, 영화 잡지도 매주 사서 볼 정도로 영화를 꽤 좋아했다. 영화관에서 일하면 그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보겠다 싶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 멀티플렉스의 탑으로 손꼽히던 코엑스 메가박스에 스태프로 지원했고 면접 날이 잡혔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던 날, 면접관은 내게 왜 극장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물었는데, 그때 내 대답이 “영화마케터가 꿈인데요, 극장에서 일하면 관객들 반응을 현장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했습니다” 였다.


준비했던 대답은 달랐던 것 같은데 그냥 그 상황에 그런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왜 이런 답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툭. 아르바이트 면접은 당연히 붙었고, 나는 박스 오피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 했던가. 그 뒤 몇 년 후, 졸업한 대학에서 조교를 마친 나는, 정말로 영화홍보대행사에서 일하게 됐다. 영화마케터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밑바닥부터 차근히 일을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업무량에 근무시간, 이와 비례하지 않는 월급으로 1년 반을 버텼다.


연차도 월차도 없이 24시간 중 평균 20시간을 일하니 당연히 몸이 망가졌고, 당시에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다.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내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나?’, ‘이렇게 평생 살 수 있나?’하는 고민이 매일 이어졌다. 상황도 따라주지 않는데 마음까지 헛헛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정시 출퇴근을 하는 중견기업 여행사에 들어가서 홍보일을 계속 했다.


재미가 없었다. 매일 크고 작은 이슈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판에 있다가 일반 회사를 갔으니 재미가 없을 만도 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나이에 나를 이끌어줄 팀장도 부재했다. 중견기업이라 전보다 급여는 높아졌고 워라밸은 지켜졌지만 직업 만족도는 최하였다. 나는 버티기에 또 실패했고, 길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당시 손꼽히던 규모의 엔터테인먼트에 이직하며 본격적으로 배우 홍보를 시작했다.



내게 취업은 그렇게 쉬웠다. 나름대로 면접 스킬이 좋았는지 면접을 보면 백발백중이었다. 그런데 버티는 것이 어려웠다. 일단 잠을 못 자니까 만성 피로가 금방 생겼다. 소화 장애, 목 디스크, 순환 장애는 다 20대에 생겼다. 잘 시간도 없고 운동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으며 매일 밤 술 미팅이 있었다. 새벽 4시에 업무가 끝나도 아침 9시 반에는 출근을 해야했다.


쉬웠던 취업만큼 버티기 또한 쉬웠다면 어땠을까. 회사를 들어가는 것보다 버텨서 살아남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생각은 그때 생겼고, 지금도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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