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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을하 May 02. 2024

팀장이 도시락 싸들고 이직을 말린 이유

얼마 전 생각지 못한 이직 제안을 받았다.

지원하지도 않은 회사로부터 이직제안을 받은 건 독일에서만 두 번째다. 처음엔 리크루터를 통한 다른 공기업 자리였고, 이번에는 독일 어느 사기업의 인사과장으로부터 직접 온 제안이었다.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매우 매력적이었다. 연봉인상률도 일반 이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높았고, 휴가일수 최대, 야근수당 보장 등 복지도 나쁘지 않았다. 같은 산업군이라 업무도 꽤 유사성이 있거나 80% 이상 같은 실무를 하는 자리였으니 표면상으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달콤한 유혹을 '옳다쿠나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하며 덥석 집어먹을 나이는 지났다. 타지살이를 하며 조심성과 긴장감을 24시간 달고 살아서 그런진 몰라도 내손으로 준비하지 않고 다가오는 유혹은 항상 경계하는 편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즘 유행하는 끌어당김의 법칙 어쩌고 하는 것도 경계한다.




독일회사도 암암리에 인맥을 통해 직원의 평판을 미리 알아보는 곳들이 있는데, 직원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방법으로 새 회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불법도, 금지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도 아니다. 소개팅 나가기 전 사진 받고 대충 그 사람 성격이 어떤지 알아보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러므로 이직 전 새 회사에 대해 염탐(?) 한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다.


나 역시 내 방식대로 이직제안이 온 회사에 대한 수소문을 시작했다. 독일이 한국보다 크고 넓어도 직군이 같으면 결국 거기서 거기라 몇 다리 거치지 않고 회사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며, 직접 그 회사에 재직했던 사람뿐 아니라 장차 내 상사가 될 사람과 함께 업무를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현재 나의 팀장이었다.


현직장 팀장에게 이직사실과 회사명을 밝히는 건 자유다. 그러나 어차피 같은 업계이고, 팀장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료이자 사수였기에 숨기기보다 오히려 이직을 고려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팀장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팀장은 '이직은 너의 선택이고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존중한다'라고 운을 띄우며 덤덤하게 본인의 경험을 말해주었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업무, 남초위주의 조직문화(똑같은 말도 남자가 하면 듣고 여자가 하면 무시하는 식, 반복되는 사례가 있었다), 직장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걸 목격한 일, 육아휴직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 그리고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출장 빈도와 장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인터뷰(인터뷰를 가장한 오퍼였다) 질문 중 의아했던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대놓고 나에게 "가족이 늘어날 계획 있느냐. 사람일은 어찌될지 모르니까"라며 웃음까지 섞어 물어봤다. 한국회사였다면 '또 저런 질문을 하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겠지만, 독일회사에선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다.


개인의 사생활에 연관된 사항 - 연애, 결혼, 종교, 가족계획, 건강 등 - 에 대한 질문은 함부로 할 수 없으며, 원치 않으면 대답을 거부할 수 있다. 여태 독일회사들과 수 십 번의 인터뷰를 해봤지만 입사 전에 저런 질문을 듣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에둘러 대답하며 넘어갔는데 역시 찜찜했던 게 근거 없는 촉은 아니었던 것이다.




팀장 외에도 다른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며칠간 혼자 고민하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최종적으로 그 회사에 가지 않기로 했다. 고민하는 기간 동안 팀장은 자신의 말이 영향을 줄까 싶어 그 사안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최종적으로 지금 나의 친정인 현재 직장에 더 머물기로 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체하면 치료비에 돈만 더 들고 고생하지 않나. 결정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제목 사진출처: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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