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산다면, 독일에 한 달 이상 거주하여 공동주택에 살게 된다면 반드시 매일 손에 쥐게 될 물건이 있다. 바로 "Schlüssel". 슐뤼쎌, 열쇠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선 여전히 열쇠를 쓴다는 점, 그중에서 독일이 유독 전통적 열쇠를 선호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지어진지 채 2년이 안 된 신축도, 현재 짓고 있는 아파트 조차도 모두 열쇠 시스템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기술이 발전하여 열쇠 하나로 건물, 편지함, 집 현관까지 열 수 있지만 처음부터 열쇠 없이 디지털 도어락을 설치하는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개인주택을 짓는다면 따로 요청할 수 있지만, 공동주택엔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열쇠는 과장 보태서 '목숨걸고' 지켜야 하는데, 안그러면 최단시간 최고의 지출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현관문은 대부분 밖에서는 돌리지도, 밀지도 못하게 되어있다. 오직 열쇠를 꽂고 돌린 상태로 밀어야만 열 수 있다. 그래서 열쇠를 실내에 놓고 문을 닫아버리면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독일인들이나 장기거주자들은 "열쇠없이 문 따는 법을 배워놓으라"고 할 정도다. 말그대로 좀도둑이 문여는 방법을 배우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이란 말인가.
얼마 전, 주말 저녁에 헬스장에 가려고 나오다가 그만 열쇠를 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단 1초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웃에게 카드 따위를 빌려 열려고 시도 해봤으나, 열쇠 없이 문을 따본 경험도 없고 (당연한거 아닌가) 문이 상하면 더 골치아프기에 그냥 열쇠공을 부르기로 했다. 열쇠공이 문을 따주는 비용은 보통 50~100유로. 주말엔 할증이 붙고, 저녁이면 할증이 더 붙는다. 또한 업체마다 부르는 가격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곳을 알아봐야 한다. 약 세 군데 전화를 돌려 가장 저렴한 곳을 불렀다. 문을 따는데 걸리는 시간 2초. 지불한 비용은 120유로(194000원). 과한 가격인가?
맞다. 과하다. 1초에 97000원이니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다. 더 늦은 밤이거나, 우리가 운이 없어서 비싼 열쇠공만 가득한 곳에 살았다면 이보다 두 배는 더 불렀을거다. 실제로 8년 전에 같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주말 저녁이었음) 440유로, 무려 한화로 70만원을 현금으로 줬다. 손을 벌벌 떨며 냈던, 그때 받은 영수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영수증에는 주말저녁 할증 100%라고 써있었다. 낮에 불렀어도 220유로였다는 소리다.
한국분들은 "독일엔 도어락이 없어? 도대체 왜 안써?" 라고 질문하신다. 여기서 '한국분들'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디지털 도어락이 우리나라만큼 널리 상용화된 나라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은 디지털에 대한 불신이 유독 심한 나라다.
누가 비밀번호를 보면 어쩌지? 도어락이 해킹되면 어쩌지? 배터리가 나가서 문을 못열면 어쩌지? 잘못 작동되서 문이 열리면 어쩌지? - 실제로 대부분이 이런 걱정을 하며, '그래 역시 열쇠가 안전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왜 여전히 좀도둑이 이토록 많을까? 참 재밌는 나라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의 결과일까. 최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디지털 도어락이 꽤 잘 팔리고 있다. 그런데 이 디지털 도어락, 우리가 아는 키패드가 있는 형태의 도어락이 아니다.
그럼 어떤 형태냐?
문 안쪽(집 안)에 설치하는 형태의 기계인데, 열쇠를 끼운 채 도어락 기기를 그 위에 덮는다. 그리고 앱을 설치하여 핸드폰과 연동한다. 즉, 사람 대신 기계가 문에 꽂힌 열쇠를 돌려주는 거다.ㅋㅋㅋ 나는 이걸 보고 지독하게 독일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열쇠 좀 포기하면 안될까?
아마 쉽지 않을거다.
독일은 공동주택에선 집주인 조차 열쇠 하나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되어있다. 미관상 통일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발코니에 치는 차양 색상까지 통제한다. 그러니 우리집 현관만 달랑 키패드로 바꾸면 다른 집과 통일성이 완전 깨져버리지 않는가. 따라서 오직 '집 안'에만 설치하는 방식이어야하고, 외부 열쇠구멍의 외관을 해치치 않아야 하므로 이런 독특한 형태의 디지털 도어락이 탄생한 것이다. 독일 아파트, 혹은 이웃과 벽을 하나라도 맞대고 있다면 집을 구매했더라도 '벽 안' 만 개인 소유이고, 외부는 공동재산이다. 그리고 공동재산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아무튼 최근 출시된 이 도어락의 가격은 대략 300유로에 육박한다.
그냥 목숨걸고 열쇠 잘 챙길 것이냐,
아니면 열쇠공 두 번 불렀다 치고 도어락을 달 것이냐,
선택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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