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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오마주 Aug 18. 2024

1화. 정사장 이데아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데아
[ idea]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근대에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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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이데아 [ide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른일곱, 다시 꿈을 선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던 문장을 찾았다.


"밖에 나가야지, 책상에 앉아서 나온 글들은 가짜잖아?"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눈빛을 떠올렸다. 경멸했다, 나의 일과 나의 모습을.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며 천연덕스러웠다. 그때부터였다. 그와 대화할 때 마주 보지 않았다. 아무리 진실한 관계라도 시간이 지나면 공허하다. 그는 지적하는 순간을 즐거워했던 것도 같다. 잘못을 꼬집고 뜯어내는 밀림의 '즐거운 하이에나 한 마리' 같았다. 삶의 방식이 다양하다고, 변명하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해져 갔다. 상식이라는 게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끝까지 관찰했다.


우리의 즐거움은 나눌 수 없는 것, 뺏고 뺏기는 것, 누군가의 소음과 분노는 누군가의 즐거움.


그가 주무르다가 내팽개친 것은 내 자존심일까, 능력 최대치로 노력했던 그의 사랑이었을까.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더 이상 남자와 여자일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정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덮고 덮었다. 모든 감정을 모른 척하는 것도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감정이었다.


그, 원재는 결국 떠났다.


"너는 너만 잘살면 되는 거잖아! 이기적인 새끼!"


 무응답이 최고의 답변이라 생각했다. 원재는 떠나며, 변명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했다. '그'라는 호칭에서 이름으로 바뀐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너'라는 호칭은 싫다고 했으며, 더 이상 '너의 오빠'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의 이름을 넣어서 '웅이 아빠'라고 엮지도 말라고 했다. 어디에서도 '그'라는 호칭이나 '남편'이라는 지칭을 하지 말라고 했다. 오직 메마른 감정으로 '정원재 씨'라고 부르라고 했다.


예견된 바였다. 나의 삶은 젊음과 늙음 사이에서 어지러움증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의 일생이라고나 할까, 곱게 분칠하고 연지 바른다. 아직은 아침 바람에 흩날리는 젖은 머리칼이 나무 그림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옷깃도 스쳐 토닥인다. 그렇지, 그래. 텅 빈 시간을 만졌다. 시간은 배신해도 인생은 아름답다. 한쪽 어깨에 걸쳐 있던 노트북이 든 무거운 가방을 사선으로 고쳐맸다. 무관하게도 시간은 모습마다 패스트리 빵처럼 겹겹이 뜯겨나간다.


 인생은 아름다워도 시간은 배신했다. 아침에 젊은 여자의 젖은 머리칼과 아무렇지 않게 내민 할머니들의 튀어나온 젖꼭지처럼 그저 시간이 스쳤다. 꿈이라는 허황된 것들은 다른 건 먹지도 못했다. 시간을 먹이로 삼는다. 남은 온갖 것들이 찾아와도 할머니의 거친 손이 뭘 한참이나 버리는지, 버린 손으로 뭘 그렇게도 많이 사는지, 지켜만 볼 뿐이었다. 여자는 할머니가 될 줄 모를 것이고, 할머니는 젊은 여자가 부럽지도 않다.


 나이를 책정하지 않는 삶, 개성이 확고하다는 게 잘못은 아니었다. 잘못처럼 보일 뿐이었다. 원재의 말처럼 나는 늙지 않았다. 일생동안 얼굴이 거의 변하지 않았고 약간의 주름만이 늘어났다. 이를 테면, 여성성을 포함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생각도 그랬다. 결혼이나 출산을 인생의 변곡점으로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원재는 변했다. 고등어 같던 굵고 하얗게 예쁘던 팔은 잔근육만 가득하게 탔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아졌고, 머리는 늘 땀으로 범벅이다. 원재가 가여워서 등을 어루만지려다, 으르렁댔던 지난날이 겹쳐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원재를 그렇게 놓쳤다.


원재가 나간 지 3일째, 여동생이 일터로 찾아왔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내가 글을 멈추지 않았어."


"그게 무슨 잘못인데?"


"전화 주문이 들어왔는데, 멈추질 않았어. 아니, 멈출 수 없었어."


".... 왜?"


 변명하지 못했다. 원재가 화가 난 이유는 확실했다. 생각나는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바로 써야만 했다. 쓰지 않으면 잊고, 다시 생각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눈총을 받아도 무조건 써야만 했다. 같이 장사하면서 몇 번이나 울컥했다. 전화소리가 들렸지만, 전화보다는 글이 먼저였다. 한번 더 울렸다. '이 줄만 마무리하고...' 하다가 결국 전화 주문을 놓쳤다. 다 쓰고 전화를 하니, 다른 곳에 주문을 이미 했다고 했다. 배달을 갔다 온 원재는 그 모습을 보고 울화통이 터졌다. 내가 들어갈만한 큰 쥐구멍을 찾았다. 원재 입장에서는 청춘을 바친 생업과 취미에 가까운 부업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난 성격이 더 뾰족해졌다.


"일은 하고 놀라고!"


"논다니?"


"그럼, 그게 뭔데? 돈이 돼? 장사에 도움이 되냐? “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서 울었다. 자유 의지 없이 일만 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인가, 애통했다. 곁에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욱 아파왔다. 또 장면들이 반복되었다. 머리를 움켜잡았다.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했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불확실했다. 매일 글을 쓰는데도 늘 부족하다. 12시간을 내도록 써도 될지 아닐지 모르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면서. 삶이 조난당한 것만 같았다. 원재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의 삶도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왜 무기력하게 원재를 잡지 않았을까? 혹시 잡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원재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 열정적인 만큼, 환희와 분노의 감정표현이 많다. 사랑할 때는 그게 제일 좋았다. 원재는 곧잘 '나 벌어도 우리를 위한 거다, 우린 함께다, 아쉬움 없는 미래를 꿈꾸자'라고 했었다. 아이가 만삭일 때 원재가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었다. 잘 될 거라고 응원했고, 장사하게 되면 도와준다고 했다. 함께 일할줄 몰랐다. 원재도 나만큼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생활이다. 예쁘게 꾸미길하나, 다정하길 하나, 집안일을 잘하길 하나, 매일 '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애'라고 하는데, 행복할리 없다. 돈 벌려고 나왔지만 돈 버는 것만이 다라면, 비참할 인생이다. 그런데 둘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언니, 그래서 지금 어디 있대?"


"모르겠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아. 정말 고되게 일한 여름날이었거든?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나한테 왜 작은 옷을 입고 왔는지 묻더라고. 빨래를 못해서, 큰 옷밖에 없었다, 큰 옷 입으면 일할 때 불편해서 그렇다고 했지. 몸이 울퉁불퉁해서 그 옷은 더 뚱뚱해 보인데. 아는데도 입고 온 거라고, 하루종일 일하고 남편한테 지적당하니까 죽고 싶다고. 그러니까 말도 못 하녜, 그래서 또 말했지. 돈 못 버는 사람한테 돈 못 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인데 말하면 안 되냐고, 부부지만 같이 사는 게 괴롭다 하는 건 사실인데 지적 아니면 뭐냐고, 정신이 아픈 사람한테 아프냐고 물어보는 것도 사실인데, 있는 그대로 말하고 다녀도 되는데 사람들이 왜 말 안 하는지 아느냐고. 멍청해서 그런 줄 아냐고."


"언니도 진짜 억세다. 그래서 뭐라 하던데?"


"가만있지 뭘. 말한 김에 덧붙였지. 하루종일 장사해도 돈 안된다고 한숨 쉬고, 말한 거 바로 안 하면 잡아먹을 듯이 눈 부라리고, 시간 나면 계속 누워있기나 하고, 외모 지적질이나 하고. 도대체 남편으로 어떤 면을 사랑해야 하는 거냐고, 어차피 적당히 하기로 마음먹고 사는 인생이면 예의도 적당히 지키라고."


"와, 이거 편 들어줘야 돼, 말아야 돼? 나, 너무 무서워."

 

"나중에는 밥 먹는 것도 보기 싫어지더라. 치사하잖아."


둥글게만 돌아가는 시계처럼 사람도 그렇게만 살면 좋겠다. 화난다고 집 나간 남편이나, 집을 나간 남편을 찾지 않는 부인이나 정상은 없다. 세상에 째깍째깍 약속처럼만 가면 되겠지만, 약속이라는 게 지킬 때보다 어길 때가 더 많다. 그래서 '규칙'이라고 하지 않고, '약속'이라고 한다. 오늘도 아빠가 안 들어오냐고 물어보는 아이를 보며 최대한 웃어본다. '내일은 출장에서 돌아오실 거야.' 아이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말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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