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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오마주 Oct 06. 2024

8화. 무전유죄 유전무죄

무뎌진 칼날을 연마하기 위하여




글쓰기가 없는 삶은 죄스럽다.



*다만 내가 글쓰기를 그만둔 이유를 짐작하려 할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원재의 태도와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 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나의 얼굴이.


귀에다 녹음기를 대고 반복해서 들었다.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핸드폰에 짧게 쓰기도 하지만, 단락, 글로 완성되지 못했다. 한숨 쉬는 날이 많아지고, 벽을 보는 날이 늘었다. 벽에 뭐라도 쓰여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원재는 그런 나를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곤 했다. '책 읽기'를 허용했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오빠'라고 불러주길.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길, 존대하지 않길, 함께 앉아 밥 먹기를 바랐다.


옆집 미용실에서 구운 고등어 한 마리를 보냈다.


미용실 사장님에게는 늦둥이가 있다. 웅이와 동갑 남자아이, 웅이처럼 가게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학교를 같이 다니고, 학원을 같이 다닌다. 가끔 집에서 하기 힘든 반찬들은 나눠먹곤 한다.


원재는 그런 우리를, '인생의 자매'라고 했다. 원재는 돌아온 뒤로 ‘인생의’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반으로 잘려 굽힌 나란히 누운 두장을 보며, 원재는 말을 꺼냈다.'인생의 고등어네.'로 시작했었다. 고등어의 가시를 바르고, 뱃살을 내 밥그릇에 담아주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인생을 이야기했다. 자꾸 떨어지는 매출에 장사를 그만두고 각자 취업해서 회사를 다니는 건 어떠냐고 말을 이어갔다. '하긴, 이 나이에 다시 어딜 취업하겠어, 인생의 무게가 무겁구만.' 혼자 대답했다. 발작버튼을 눌렀다. '이제 그만' 외칠 때까지 고등어를 내 밥그릇에 퍼다 날랐다. 그의 손은 온통 생선 기름이었다. 어느새 밥보다 많은 생선살, 어느새 진실보다 많아진 현실.


'내가 왜 너의 무게까지 나눠 들어야 하지?'


최대한 다정한 그를 향해 나는 마음으로 쏘아붙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다. 와플 기계에 눌린 채로, 붕어빵 틀에 갇힌 채로, 은박지에 싸인 채로, 실에 둘둘 감긴 채로 불합리하게 결속되어 있다. 우리는 불을 향해 무작정 머리를 박아대는 나방들처럼 '웅이'를 위해 살고 있다. 나는 너와 분명히 다르다. 너와 같은 밥을 먹고, 너와 같은 집에 살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의 미래는 다를 수 있다. 같이 산다고 같이 잘되는 건 아니니까. 배경이 같다고 길이 같은 건 아니니까.


"너 이제 살 그만 빼. 볼륨이 하나도 없어."

"가난한데 뚱뚱하면 더 외롭거든."


모난 돌에는 짱돌만큼 알맞은 대응도 없다. 고마움 하나 없는 호의와 고마움 하나 없는 밥을 욱여넣는다. 밥을 먹고 나니 원재는 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계는 얼마 전에 이혼했다.


"1등도 아니도 2등인데 무슨 이혼이야? 그걸로 세상 살이 나아지는가?"

"이혼당한 거야. 애들이 싫다고 했대."


원재는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말의 높이와 속도는 제법 신난 상태였다.


호계는 왜 이혼당했을까? 로또였다. 이번 로또 1등은 13명이고, 28억씩이다. 세금을 반으로 뗀다고 해도, 14억이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평생 이자만 받아서 살아도 행복하다. 그런데 호계는 로또 2등에 당첨되었다. 약 6천만 원의 당첨금을 호계는 사업에 밀어 넣었다. 호계의 사업이라고 함은 '오토'였다. 자동화로 돌아가는 돈기계를 만든 셈이다. 몇십 년 전도 아니고 어떻게 6천만 원으로 가능한 이야기냐고 했을 때, 호계는 '세상은 변하지 않아.' 변신을 할 듯 눈알을 돌렸다고 했다. 호계의 사업은 그야말로 '오토'였다. 콜에 맞춰 사람을 네모 반듯한 공간에 넣어주고, 웅이의 태권도 관장님처럼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고, 차로 퇴근시켜 주면 되는 일이었다. 호계는 원래 하던 노래방을 베이스캠프로 했다. 원재는 호계의 쉬운 돈 벌기에 대리만족했다. 호계는 '인생 역전'을, 원재는 ‘인생 출장’ 이야기를, 나는 ‘인생 연명’을 이어갔다.


먹고살기 위해 다시 '함께' 일을 했다.


무뎌진 칼날을 연마하기 위하여 칼갈이를 꺼냈다. 칼도 쓰다 보면 결이 생긴다. 걸음걸이처럼 손의 움직임이 칼에 고스란히 남는다. 칼갈이는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 날카롭고 뻣뻣한 부분에 30번쯤 갈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면을 10번 정도 문지른다. 칼을 쓸 때는 물기가 가장 위험하다. 물기 없는 칼날, 물기 없는 손잡이가 질주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마음속으로 '시-땅!' 방아쇠를 당기고 내달린다. 사각거리는 양파소리와 도마의 얇은 단면에 칼날이 정확하게 박히는 촉감이 안정적이다. 칼을 쓰고 나면 나도 안정된다. 겉으로 용서하면, 속도 용서 같은 감정이 나지막이 올라온다.


썰은 양파를 봉지에 담으며, 원재에게 갑자기 물었다.


"그래서 이혼한 거야?"

"아니, 그 자식이 잘못했지. 스무 살짜리랑..."


원재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수신호 같은 손짓을 했다.


"맙소사. 우라질 놈, 첫째가 열일곱 아니야?"

"그래도 친구로는 안 그래. 돈이랑 여자 문제만 그렇지..."


이혼이 호계에게 충분한 벌일까? 자기 자신의 잘못에 관대한 사람, 충분히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말하고 싶다. '넌 천벌 받을 거야, 지옥 갈 거야.' 그러나, 그들은 교양이라는 잡다한 기술을 익히지 못했을 뿐이다. 혹은 익힐 생각이 없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 없지, 끝난 건 아니니까.' 내 나이 환갑이 기적이 될 수 있는 일이다. '희망 따위에 목숨걸 필요 없지. 현실을 살 거니까.' 잠시 움츠림 모드일 뿐이다. 활짝 피기 전 상태로 아주 오래 있을 뿐이다.


결혼의 이유는 사랑일지 모르나, 결혼 생활은 기능이다. 장롱이나 침대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쁠 때는 근처까지 가지도 않고, 소파에 쉬다가 잠든다. 침대에는 내일 자도 되니까, 찾지 않는다. 잠시 옷을 의자에 걸치면 되니까, 옷장까지 가지 않는다. 쓰는 동안 삐걱이는 부교합의 소리를 내면 거슬린다는 생각이 든다. 버리거나 교체하는 비용을 생각하게 된다. 폐기물 스티커 개수를 손가락으로 세어본다. 그런 것들이 결혼생활이었다.


돈 때문일까?

나의 죄도, 돈이 문제일까?

마음에 날카로운 칼들을 연마해 본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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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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