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엄마들의 용돈 벌이 딜레마
우리나라 경력단절 여성들이 자기 계발도 이루면서 경제력을 갖춘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하지만 둘 다 이루기는 쉽지 않음을 나는 육아 10년 차 되던 해에야 깨달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이 우선순위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제야 고백한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자기 계발을 외쳤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했음을.
첫 아이의 초등 입학 후 처음 참석한 학부모 총회. 그곳에서 내 또래의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날의 감정은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도태된 내 모습에 대한 자괴감이었다. 번듯한 잡지사의 기자로, 프리랜서로 활동한 이력은 종료된 지 이미 오래였기에, 당시의 나는 또래의 담임 선생님에게 선망과 부러움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아무리 꾸며도 빛이 나지 않는, 날마다 통장 잔액 신경 쓰며 장을 보는 평범한 아줌마는 그날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난다.
집에 와서는 충동적으로 잡코리아, 인크루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편집/홍보/에디터/경력직/서울/계약직/30대/컴퓨터활용가능’ 등등 각종 키워드를 입력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지만 대부분 풀타임 근무라는 데에서 선택지를 잃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시원 솔직한 마음도 있었다. 막상 일할 용기는 없고 육아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거겠지. 이렇게 1라운드에서 나는 스스로 합리화하며 자기 계발, 경제력을 당당하게 모두 포기했다.
-그래, 아직은 애들이 어리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게 맞아.
-애들 잘 키우는 게 돈 버는 거라잖아.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건, 나도 아이에게 뭐 좀 돈 들여 가르쳐 보자는 마음이 샘솟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적어도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말이다.
마음을 먹고 둘러보기 시작하자 학원 간판만 눈에 들어온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 온갖 화려하고 탐스러운 학원들이 고개만 들면 보일 거리에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학원의 가방을 들고 저 건물을 드나드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다 씩 웃었다. 그래, 해보자.
문제는 돈이다. 학원 가방 하나를 추가하려면 그게 다 돈이다. 1학년의 학원 가방은 개당 평균 15만 원. 매달 15만 원의 여유만 더 있다면 피아노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텐데. 사교육이 욕심 난 엄마의 머릿속은 15만 원짜리 학원을 몇 개나 보낼 수 있는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나자 아이 친구 엄마들이 하나씩 복직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교사, 구청 공무원, 공기업의 과장까지 다양했다. 그들 앞에서 내가 으레 했던 “나도 일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사실 자기 계발을 꿈꾸는 멋진 엄마가 되고픈 허세 같은 거였다. 번듯한 직장은 핑계일 뿐, 그냥 쇼핑몰 장바구니에서 아이 옷을 바로 결제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고 싶었다.
하교 후 놀이터에는 이제 나만 남았다. 심지어 그때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터라, 집에는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었다. 동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쌓아놓고 주야장천 아이와 그림책을 쌓아놓고 읽어주다가 둘째 아이를 하원시키고 귀가하는 루틴이 반복됐다.
여전히 나는 용돈이 고팠지만, 일단 일할 수 없다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강박이 생겨났다. 당시 유행이었던 것이 바로 ‘독서지도사’! 모집 문구 역시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당장 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30만 원에 육박하는 교육비는 무슨 용기였는지 홀린 듯이 결제하고 당장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나름 인증된 브랜드의 수업이라는 자부심, 일단 공부를 시작한다는 느낌만으로도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기쁨과 성취감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다. 몇 주간의 강의를 듣고, 수험생처럼 필기시험까지 통과한 후 당당히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장이라도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벽이 나타났다. 회원모집이라는 벽 앞에서 주저하게 됐다. 그냥 주어진 일을 받는 수동적인 월급쟁이에서 적극적인 영업은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아이도 키우면서 돈도 벌고 경력 단절을 극복했어요
-책을 사랑하는 엄마들도 누구나
용기 없이 자격증은 고이 접어두고 다른 돈벌이는 없을까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동네 지인이 하루 알바를 제안했다. 직주근접에 식사복지까지, 아이 없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인 그 일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급식실 배식 도우미였다. 하루 일당을 받으며 며칠 가끔 대타로 나와 일해보라는 것이었다. 조리실에서 음식이 나오면 한 사람씩 밥, 국, 반찬, 후식 등을 맡아 아이들과 교직원에게 배식하는 단순 업무였다. 학교에서 아이가 밥 먹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잠깐 가서 하는 거니 부담 없겠다 싶어 시작한 일은 조금씩 나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일당 3만 원에, 점심도 먹고, 수다도 떨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900여 명의 밥을 퍼주느라 떨어질 듯 아픈 팔이나, 국물의 건더기를 고루 담느라 진땀을 빼는 일이나, 지저분하게 쌓인 식판 정리, 영양교사의 눈치를 보며 반찬이 동나지 않게 조절하는 일 정도는 괜찮았다. 다만, 30년 넘게 힘들게 식당 일을 하며 자식을 키운 엄마를 보며 내가 결심했던, 절대 몸 고된 일은 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 내내 걸렸을 뿐이다. 그 일을 설마 내가 1년 가까이하게 될 줄은, 재미가 아닌 경제력의 첫 단계가 될 줄은 몰랐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일하는 내내 나를 쪼그라들게 한 영양교사의 은근한 무시와 타박, 질퍽한 바닥 물걸레질, 하루 종일 배어있는 음식 냄새, 단순노동의 무기력함은 나 스스로에게 새로운 도전을 해 보라고 채찍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