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하게 급식실을 오가는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나는 틈틈이 탈출을 꿈꿨다. 돈이 아쉬워 당장 나가지는 못하면서도 늘 장밋빛 앞날을 구상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용감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삶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학교 현관 앞에 붙어 있는 자원봉사 모집 공고를 발견.
지역 교육청에서 저소득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 수업 프로그램 봉사자를 모집하는 포스터였다. 자원봉사임에도 유심히 들여다본 이유는 바로 '회당 1만 원'의 수고비. 무엇보다 독서 수업이라는 실전에 부딪혀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몇 주간의 교육을 거쳐야 하지만 부담 없이 경력을 쌓아볼 수 있는 기회임이 분명했기에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봉사를 위장한 경력 한 줄
인근 구청과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참석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또다시 경험한다. 뭔가 채워지는 느낌, 자라는 느낌, 단단해지는 느낌. 아, 이것은 그토록 내가 원하는 자기 계발이잖아. 우리 아이들에게 한창 책을 읽어줄 때여서 잘할 수 있다는 용기까지 더해졌다. 의외로 5,60대가 꽤 많았다는데, 각자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어른인 분들이 배우고 공부하는 모습은 또 다른 자극이 됐다.
'봉사'라는 아름다운 마인드는 그다지 없었다.
경력 어디에라도 도움 되겠지 하는 딴 궁리. 자원봉사인데 시간당 1만 원이라니 괜찮네.
계산적이고 불순한 마음가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니 한 달에 4만 원. 비록 1시간이지만 경력이 될 것이고, 돈도 주니 어디냐는 마음으로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사는 아이의 집을 매주 방문했다.
10여 평 남짓한 그 집은 5살, 7살, 9살 딸 셋을 키우는 다둥이네였다. 내가 방문하는 날은 5살 동생은 돌봄 선생님이, 7살 아이는 내가 담당하는 식이었다. 거실 소파에 수북한 빨래와 널브러져 있는 장난감... 하원 후 무기력한 아이를 보며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인지, 불편함인지 애매했다.
1만 원의 수고비만 생각했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배식 알바 후 바로 가다 보니 피곤한 데다, 집안에 함께 하는 두 명 의 어른들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집이 작다 보니 난 거실에 있다 하나 바로 옆에 식탁이 있고 그곳에서 돌봄 선생님은 5살 동생에게 늘 간식을 먹였다. 다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아이를 집중시키기 위해 오버하며 책을 읽어주는 게 민망했던 적도 있다. 게다가 안방에 아이 엄마가 버젓이 있으니 혹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나 하는 신경도 쓰이고 말이다. 아무튼 주변 상황은 그러할 뿐, 한 번 두 번 가다 보니 적응 완료. 무엇보다 학부모에게 돈을 받는 사교육이 아니었으므로 아웃풋의 압박은 없었다. 순수하지 않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순수한 봉사자의 마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가게 됐다.
그 집의 분위기가 어떻든, 청소상태가 어떻든 나에게 할당된 봉사의 시간을 채우면 됐다. 내가 맡은 50분 동안 아이와 인사하고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활동을 이어갔다. 오롯이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생소했던 K는 나를 무척 따랐다. 집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첫째와 막내 사이에서 소외되는 둘째들은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함을, 내 조카를 봐 온 경험에서 느꼈다.
책 속의 낯선 단어의 뜻을 아는지,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확인을 하거나 감상을 써내야 하는 학습의 시간은 없었다. 그저 재미있게 읽으며 아이의 아는 척에 박수를 쳐 주고, 우스개 얘기도 해가며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 됐다. 교육청에서 나눠준 교구들을 만들고 자유롭게 놀면 됐으니 풍성한 시간이었다.
낯선 아이에서 고마운 아이로
초반의 넘치던 자신감과는 달리 실제의 나는 몹시 어수룩했고, 또래 아이를 잘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당황한 적도 있었다. 그 상태로 독서논술 선생님으로 실전에 뛰어들었다면 얼마나 빈틈이 많았을지 아직도 뜨끔하다. 편견 없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존중해 주었던 그 아이가 가끔 생각난다. 처음으로 선생님의 이름으로 책을 읽어주고, 수업을 이끌어 본 첫 경험. 부족한 나에게 그 경험의 상대가 되어준 그 아이가 고맙다.
그렇게 4개월의 봉사는 금세 끝났고, 며칠 후 통장에 17만 원 입금 알림이 울렸으며 봉사활동 증명서도 받았다. 자원봉사자 역할로 재능 기부인 것처럼 찾아갔지만, 사실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달까.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경력 한 줄, 더불어 소소한 봉사료까지, 나쁘지 않았다.
독서논술 자격증에 책놀이 봉사활동. 내 새로운 경력에 두 줄이 채워졌다. 이제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나. 여전히 회원 모집과 학부모 상담은 자신 없는데 어떡하지. 급식실 배식알바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할 무렵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고, 학교는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