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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나눔 사이

책상 의자와 요거트 8개

by 다독임 Feb 09. 2025

4년 남짓 사용한 딸아이의 책상의자를 처분하게 됐다. 키가 훌쩍 자라 애매하게 걸터앉게 되면서 새로 바꿀 때가 된 것이다. 빠른 처리를 위해서는 바로 대형 폐기물로 내놓으면 되겠지만, 나름 브랜드 의자로 비싸게 주고 산 데다 아직 깨끗해서 버리기엔 영 아깝다 싶었다.


내놓아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주변에 줄 만한 사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연식은 좀 됐어도 책상에 진득하게 앉는 날이 손에 꼽을 만하다 보니 약간의 손때 빼면 거진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헌 물건이지만 아이가 쓴 물건이니 애정이 있어서 아무나 주긴 싫은 마음이랄까. 머릿속에 떠오른 몇몇의 지인들에게 필요를 물었지만 이미 다들 의자가 있다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다음 눈을 돌린 곳은 당근 마켓. 같은 제품을 2만 원으로 판매하는 사람의 것끌어올린 지 한참이기에 과감히 1만 원에 올렸다. '당근당근' 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채팅 하나 없는 날이 이어지자, 실망스러운 마음도 들면서 혼자 의자를 과대평가했나 싶기도 했다.

이래 봬도 12만 원짜리 책상보다 비싸게 주고 산 의자인데, 알리에서 산 남편의 게임용 의자보다 두세 배는 비싸게 주고 샀는데 이 정도란 말인가. 이제는 단종되어서 인기가 없는 건지 마냥 씁쓸했다. 만원에서 구차하게 깎을 바엔 차라리 폼 좋게 드림낫겠다 싶어 지역 커뮤니티 카페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쿨하게 기꺼이 가져가시라며 드림으로 내놓고 싶었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에 올리기 직전 소심하게 제목을 바꾸어 봤다.


나눔/교, 교환 품목은 바나나 우유


가끔 나눔이나 드림 게시글을 보면 조건으로 식빵 한 봉지 또는 커피 우유 한 개와 교환 원해요- 라며 써둔 것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냥 드림이면 드림이지 저건 뭔가 싶었다. 정 아쉬우면 소액을 적어 판매하지 굳이 뭐 그런 걸 원하나 싶었는데,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 정도 나눔이면 성의 표시로 받을만하지 않을까 하면서 어설프게 생색내고픈 마음이 든 것이다.

명목 상으로는 따스한 드림 문화라 하고 싶지만, 그냥 거저 주고 싶지 않았던 나의 얄팍한 심술이었나 보다.


커피우유, 초코우유, 흰 우유 여러 우유가 있지만 굳이 '바나나우유'로 쓴 것도 가만 보면 심술의 표출이었을까. 드럼통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왠지 더 정감이 가서 별 뜻 없이 고른 건데, 정작 드림받는 분에게는 뭔가 애매했나 보다. 바나나우유- 덜렁 다섯 글자만 써둔 나의 메시지에 고민이 되었는지 당일 아침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의자 드림받기로 한 사람인데요, 혹시 바나나우유 어떤 거 원하시는지요?


아차- 나는 그저 성의 표시 같은 드럼통 모양의 바나나우유 한두 개 정도를 의미했지만, 이분에게는 애매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바나나우유도 알고 보면 용량도 브랜드도 용기 타입도 제각각인데 말이다. 진상 드림이 되지 않기 위해 재빨리 회신을 보냈다.


-꼭 그거 아녀도 되고요,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의자는 현관 앞에 두었습니다.


비대면 문고리 드림이어서 그렇게 의자만 내놓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의자 있던 자리에는 요거트 8개가 놓여있었다.

-감사히 가져왔습니다. 박스 위에 올려놨습니다. 

문자 메시지와 함께.  



브런치 글 이미지 2


어쩌다 사는 플레인 요거트만 보다가 키위맛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집에 있던 것을 들고 왔든 사서 왔든 성의 표현에 흐뭇함을 느끼다가, 한편으로는 쿨하지 못한 나의 드림 태도를 되돌아봤다. 모쪼록 그분도 좋은 마음으로 주시고 의자도 잘 사용하셨으면 하는 마음인데 어떨지 모르겠다. 혹시 드림으로 받아다가 당근에 되파는 사람은 아니기만을 바라며.

 

아무튼 아이의 의자는 아쉽지만 떠나보냈고, 먼저 구입한 새 의자는 서울대의자라고 불리는 유명 브랜드의 카피 제품이다. 아무래도 책상에 진득히 앉아 공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을 비우고 저렴한 것으로 골랐다. 4만 9천9백 원. 이 가격이면 앉아서 공부를 하든 말든, 팔걸이를 부러뜨리든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편안한 마음이다. 언젠가 고장 나서 못 쓰게 되는 날이 온다면 구차하게 미련 갖지 말고 바로 폐기물로 내놓으리라.

브런치 글 이미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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