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통해 슬기로운 경제생활 준비하기
아이브의 새 앨범 예약주문 이벤트가 종료된 다음 날, 우리 집은 유난히 조용했다. 하루종일 쉴 새 없이 떠들고 노는 13세 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앨범도 사지 못한 딸아이의 슬픔은 급기야 입을 닫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절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질문할 때나 마지못해 "응, 아니" 정도만 겨우 하는 애매한 묵언투쟁. 뭐 그거 하나 안 사주냐- 하겠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다. 덕질인지 물욕인지 모를 딸의 마음을.
작년 봄쯤, 딸은 주위 친구들이 아이돌 앨범 모으는 것을 보며 조금씩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본인은 아이브의 팬이 되겠노라 하더니, 5월에 발매되는 새 앨범을 어린이날 선물로 받고 싶다는 게 아닌가. 뭔가 싶어 찾아보니 가격이 웬일, 앨범 4장 세트가 7만 원 대.
"그럼 1장만 사주면 되지"라고 생각했다면 요즘 물정 모르는 소리. 우리네 시절과 전혀 다른 요즘 가수의 앨범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앨범 속 화보집과 포스터, 포카(포토카드) 등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앨범 구입 시 딸려오는 럭드(럭키드로우) 포카가 핵심. 오로지 그것을 위해 앨범 네 장이 아니라 열 장 넘게 사는 아이들도 수두룩하다니 말 다했다.
-다른 애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어. 다른 친구들 엄마아빠는 다 사준다는데.
결국 그 말에 흔들리고 말았다. 그래, 결국 요즘 애들 다 있다는데 한 번은 사주자 싶은 마음이었다.
발매일 아침, 남편은 딸과 함께 부지런히 명동 음반 매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대기번호 400번대. 하루 종일 아빠를 끌고 명동거리와 영화관을 배회하다 오후 늦게야 들어선 매장에서 딸은 그토록 소원하던 네 장의 앨범과 럭드 포카를 손에 쥐었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귀가하더니 오자마자 경건하게 앨범을 하나하나 뜯고, 방에 포스터를 붙이고, 화보집과 가사집을 정독하고, 포카는 바인더에 소중하게 보관하며 마냥 신나 했다. 그런 게 덕질의 환희란 걸까.
영원할 것 같던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정성 들여 붙인 포스터는 너울대다 떨어지고 굴러다녀 일찌감치 접혀 들어갔고, 포카는 글쎄 어디엔가 보관 중이겠지. CD는 장식용일 뿐 정작 음악은 스포티파이로 듣는 아이러니.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가을쯤엔 아이브 굿즈 팝업 스토어에 불꽃 대기를 걸어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그때 구입한 몇만 원어치 물건들도 지금 딸의 방 어딘가에 박혀있거나 쓸모를 잃은 지 오래. 그게 작년의 일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새 앨범을 사고 싶다고 전전긍긍하는 딸의 반응에 우리 부부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몇 달 전 우연히 들어간 음반 매장에서 본 장면도 떠올랐다. 청소년 무리가 앨범 여러 장을 사서 포카 몇 장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
딸은 아직 따로 용돈을 받지 않고 필요할 때만 돈을 받는 데다, 할머니들로부터 소소하게 받는 만원 단위 용돈은 쓰기에 바빠 수중에 돈이 없다. 본인 통장의 돈은 그림의 떡인걸 알면서도 이번 앨범은 그 돈으로라도 간절히 사고 싶어 했다. 사실, 눈감고 한번 딱 사주면 모든 것이 평화로웠을 것이다. 딸의 덕질을 응원해 주는 쿨한 부모로 비쳤겠지. 그러나 아직 덕질과 물욕의 경계에 애매하게 서 있는 딸에게 선뜻 사줄 수 없는 마음을 누가 이해할까.
본인 용돈을 모아 사게 하라는 말도 많이 들어봤다. 사실 5학년 때부터 일주일 치 용돈을 줘봤지만 흥청망청 쾌락소비에 빠진 딸은 늘 마이너스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기입장도 처음엔 야무지게 썼지만 결국 용돈은 용돈대로, 엄마돈은 엄마돈 대로 쓰며 아슬아슬 경제생활을 이어갔다. 그래서 용돈이 금지됐다. 물론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따박따박 관리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도 잘못이다.
그러니 본인 돈은 통장(개인 용도로는 인출 불가)에 들어 있으니 사고 싶은 게 있다면 부모가 사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기준이 애매모호하니 이번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고 본다.
어릴 때야 잠자코 부모 말에 수긍하고 잠시 뾰로통하다 말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유효하겠는가. 사춘기에 더 깊이 들어가기 전, 돈의 가치를 소중히 알고 지혜롭게 소비하는 경제 교육 한마당을 준비해야겠다.
무작정 비싸서 안돼, 쓸모없으니 안돼-라는 말은 반발심의 불씨만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분명 또래의 문화 속에서 경험한 본인의 생각도 있을 텐데, 그저 충동적 헛된 소비라고만 단정 짓기엔 이제 아이가 많이 자랐다. 차분히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고 귀기울이는 성숙한 부모의 자세도 필요하다. 본인 용돈을 잘 관리하면서 적절한 덕질 내에서 사는 것은 허용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지만.
묵언투쟁 다음날, 다행히 말문은 조금 트였지만 여전히 먹구름 상태인 딸을 데리고 동네 교보문고를 찾았다. 마음 약한 엄마는 그래도 한 장이라도 사줄까 싶어서였다. 단, 럭드 혜택도 끝난 앨범을 제 값 주고 사는 건 아니다 싶어서 네 장은 안된다고 단호히 못을 박았다. 또 이제 와서 못 이기는 척 다 사주면 그간의 훈계가 말짱 헛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한 장만 살 수는 없다는 딸은 망부석처럼 매대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었다. 도무지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는 딸의 괴로움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이라도 존중해주고 싶었다. 다만 네 장을 다 사지 않는 한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앨범 한 장과 카드지갑 패키지를 구입하는 것으로 서로 합의했다. 결국 앨범 한 장은 엄마의 돈으로, 카드 지갑 패키지는 문제집을 다 풀면 받는 선물을 한참 앞당겨서 대체하는 것으로 묵언투쟁 종료.
그렇게 앨범 한 장과 카드지갑 세트를 손에 쥐고서야 딸의 명랑한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방구석 언박싱을 종료하고, 집 앞 도서관에서 딸과 오래간만에 찾은 평화. 소중한 장면을 담아 남편에게 전송하며 이번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지었다.
#다시우리딸로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