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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Nov 15. 2023

커피 애호가의 기쁨과 슬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원두를 내려마시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은 커피·프림·설탕이 들어간, 소위 말하는 다방커피를 마셨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부터 커피를 좋아했던 부모님은 매일 커피를 드셨다. 집안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고소한 향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코를 벌름거리며 찻잔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마다 부모님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거라고.


커피 맛을 처음 알게 된 건 슈퍼에서 팔던 커피우유를 통해서였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료가 초코우유인줄 알았던 나에게 커피우유는 ‘세상은 넓고 맛있는 건 많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커피우유를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부모님은 초코우유보다 커피우유를 더 엄격히 제한했다. 커피우유도 '우유'라는 나의 주장은 부모님에겐 통하지 않았다. 우유는 아이가 먹어도 되는 것이지만 안에 들어있는 커피 맛(향)은 아니었다. 


사춘기로 접어들자 자아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땐 톡 건드리면 뻥 터져버릴 만큼 비대해졌다. 나이만 어릴 뿐, 이미 다 컸다고 믿었던 나는 독서실 앞에 있던 자판기에서 난생 처음으로 커피를 뽑아 마셨다. 지금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당시엔 일탈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음료를 어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셨다는 것은 어른처럼 행동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믹스커피는 커피우유보다 더 쓰고 더 달고 더 진했다. 잠을 확 달아나게 만드는 각성효과는 충격적이었다. 꾸벅꾸벅 졸아야 마땅한 시간에도 정신은 또렷했다. 온몸의 세포들도 활기가 넘쳤다. 맑고 개운한 상태는 집중력을 높여 주었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 새벽 두시 정도까지는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시험 기간이 되면, 특히 벼락치기가 필요한 날엔,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물론 독서실에 갈 때만.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커피는 더 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었다. 평소엔 하루에 세잔씩 마셨고, 시험 기간엔 더 많이 마시기도 했다. 편의점과 마트엔 언제든 골라잡을 수 있는 커피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커피전문점의 확산을 계기로 선택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기분을 끌어올려 주고 컨디션을 팽팽하게 당겨주는 이 신묘한 음료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언제든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커피에 대한 애정은 집착에 가까워졌다. 피로에 찌든 몸을 깨우기 위해선 다량의 카페인이 필요했다. 살기 위해 마신다는 말을 온몸으로 이해한 이후로 커피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다. 사회초년생 시절까지만 해도 카페모카 같은 달달한 커피를 선호했지만, 이십대 후반이 되자 아메리카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시기에 이루어진 운명적인 만남은 커피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가 좋아서 카페에 갔지만, 카페가 좋아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카페를 방문하는 동안 분위기 좋은 곳보다는 직접 로스팅하는 곳이, 디저트가 화려한 곳보다는 커피에 집중하는 곳이 더 믿음직스럽다는 것을 터득했다. 아메리카노는 어느 카페에나 있는 메뉴지만 세상에 똑같는 아메리카노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많이 마시다 보니 취향이란 게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두를 구입해서 직접 내려마시기 시작했다. 

 

커피와 함께 살아온 날들이 인생의 절반을 넘겼을 즈음, 불면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오후 6시쯤 마시면 자정 무렵엔 잠이 들었는데 그 시간이 5시로 당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4시로 당겨졌다. 어떤 날에는 3시에 마셔도 새벽이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붙여도 자다깨다를 반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면의 질이 떨어질수록 몽롱한 상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쉽게 피곤해졌고, 쉬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체력 떨어지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렸다.


    



수면 시간 확보를 위해선 타협해야만 했다. 아침에 한 잔, 오후에 두 잔을 마셨던 커피는 아침에 한 잔, 오후에 한 잔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커피타임은 오후 3시를 넘기지 않았고, 그 이후에 마셔야 할 상황이 되면 디카페인 커피나 다른 음료를 마셨다. 한 번에 마시는 커피의 양도 원래 마시던 양의 3분의 2정도로 줄였다. 특단의 조치 덕분에 잠드는 시간이 조금 빨라졌다. 수면의 질도 향상됐다. 


불면증이 개선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삶의 질을 위해 시작한 일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힘들어졌고, 나른한 기운을 떨쳐내는게 어려워졌다. 오후 2시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빨리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서글펐던 건, 매일 누리던 기쁨의 양이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잠을 위해 스스로 줄인 커피의 양보다 훨씬 많이.   

  

원래도 카페인 민감도가 낮은 편이 아니었다. 단지 분해 속도가 빠를 뿐이었다. 나이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지만, 분해 속도가 느려진 원인이 '나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페인 민감도가 높아질수록 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카페인의 총량은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커피를 꾸준히 마셔온 내가 이 과정을 겪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에 가까웠다. 노화를 늦출 순 있어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마실 수 있는 커피의 양은 더 줄어들 수도 있다. 건강을 위해 커피를 아예 끊어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슬픈 일이지만, 현재의 상태가 쭉 유지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현재를 더 충실히 사는 것. 그래서 예전만큼 즐기지 못함을 슬퍼하기보다 아직까지 즐길 수 있음을 기뻐하기로 했다. 디카페인 커피라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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