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면 당연히 자녀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기를 원한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가족 모두가 청계천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을 흐르는 천의 한쪽에는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었는지 동전이 제법 물 속에 쌓여 있었다. 우리 가족도 동전을 던지며 한 가지씩 소원을 빌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둘째 아들의 소원이 있었다. 소원은 이러했다. “엄마가 내 말을 잘 듣게 해주세요”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이 많았던 둘째는 자신이 사달라고 조르는데도 엄마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것이 속상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아이가 말만 잘 들어주면 공부도 잘하고 특기도 인성도 좋아지고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고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확신하는가이다. 아이가 부모인 자신의 말만 잘 따라 준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아이를 불필요하게 통제한다. 전혀 다른 인격체인 자녀를 부모의 의도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가려 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부자녀이기주의의 극단적인 형태가 나온다.
부모의 편향적이고 이기적인 양육의 태도는 아이를 스트레스로 내몬다. 아이를 극단으로 몰아 가고 더 나아가 범죄에 가까운 상태를 만든다. 어쩌면 부모의 양육 방식이 범죄 이상으로 심각하게 사회에 폐해를 끼칠 수 있다. 박재원과 구해진의 공동 저서인 ‘핀란드의 부모 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너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누구니?” 라고 중고등학생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엄마”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친밀했던 사람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 준 절대적 존재가 아이의 고통의 근원이다. 아이가 좌절과 상실감에 혼돈스러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부는 아이가 모르는 것을 알아 가는 과정인데도 아이에게 정해진 답만 강요한다. 더 많은 외우기를 강요하고 있다. 성공에 이르는 길은 수만 가지가 있어서 얼마든지 다양한 능력을 통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부모의 모습을 보라. 이제 초등학생 중학생에게 요구되는 삶의 강도는 너무나 가혹하다. 고등학생이 직장인보다 피곤하고 지친 삶을 살아 간다. 아이가 성숙되지 않은 시기에 삶의 진을 다 빼놓는다. 아이가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했을 때 제 몫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책을 보는 아이도 거의 없다. 행여나 책을 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동료가 특이한 사람 취급을 한다.
학생시절에 얼마나 진저리 나게 공부에 시달렸으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책을 보려 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에 걸친 학습 생활이 있었다. 공부가 습관화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것을 졸업하면서 변한다. 학습에 대해 그렇게 강한 반감과 적대감을 갖게 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공부는 고통과 동일한 단어로 학습되고 세뇌된 셈이다. 공부를 적대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생의 단계별로 진행되어야 하는 학습에 단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알아 가는 지혜의 기쁨을 누가 고통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일평생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존재다. 개인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만 학습을 보면 안 된다. 학습을 통해 달성되는 성과보다는 학습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지능력과 창의성과 인성이 향상된다. 협력하는 학습의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적응력과 협력의 에너지가 나온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넓은 마음으로 아이의 인생을 바라보자.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자. 아이는 바람직하게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이는 남의 성공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이가 스스로 꿈꾸게 하려면 무조건적인 수용과 격려와 애정 있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부모는 기꺼이 토양이 되어 주어야 한다. 애초에 토양 자체가 척박 하다면 꿈꾸는 아이가 자랄 수 없다. 척박한 마음에서 척박한 토양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모에게서 나오는 척박한 토양이야 말로 아이에게는 가장 해롭다. 척박한 토양에서는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얻을 수 없다.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척박한 토양이라는 것은 부모의 형체 없는 불안감이라는 척박한 마음에서 나온다. 불안감은 부모의 기억 속을 어지러이 부딪쳐 다니는 지난 날의 경험에 의해 유발된다. 부모가 겪었던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 이기심과 야욕 그리고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부모의 삶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그대로 전이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부모의 과거가 아이의 미래에서 데자뷰 되면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부모 과거의 삶이 아이의 미래 삶을 뒤덮을 수도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부모는 틈만 나면 아이에게 자신의 기억을 고스란히 전달하려고 한다. 이미 모든 게 변했다. 지금도 계속해서 바뀌어 가고 있는데도 부모는 과거의 경험 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부모가 경험한 지식이 미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낡은 과거의 기준으로 정하려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를 통제하는 한 미래의 희망은 없다. 경험을 통해 확인된 안전한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려면 아이에게서 부모의 삶을 거두어 내야 한다. 아이의 역동적 삶이 부모의 삶에 눌리지 않도록 부모의 그림자를 지워야 한다. 새로움을 꿈꾸면서도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미래 속에서 다시 되풀이되는 과거만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경험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어쩌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삶을 살아 가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감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행복한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 부모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부모는 두려워서 가보려 하지 않았던 길을 아이는 거침없이 내디딜 수 있다. 다음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낫다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내딛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저항은 배신이 아니다. 기존질서에 대한 거부는 혼란이 아니다. 아이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기존의 굴레와 부딪치며 충돌하겠지만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발전적인 에너지다. 아이는 많이 부딪칠수록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고 깨닫게 되고 자생적인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누에고치도 내부에서 스스로 누에고치를 찢고 나오면 아름다운 나비로 날아다닐 수 있지만 외부에서 누에고치를 찢어주면 날지 못하고 곧바로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아이의 삶을 부모가 이끌어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충분히 자신의 세상을 열어 갈 내적 에너지가 있다. 아이에게 부모가 열어주는 편안한 세상은 삶의 독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가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에 있다.
한 잔의 커피를 놓고
아이 문제로 골몰하다 보면
얻어지는 답과는 다르게
부모의 가슴은 더욱 더 멍울이 진다.
많은 이야기 속에 부딪치는 분노와 흥분
기대와 희망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부모라는 원죄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담고 갈 일도 아니건만,
한 걸음의 진전조차 없이
늘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여전히 부모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