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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Oct 20. 2024

와인잔에 담고 싶은 향기

#와인마다 다른 형태 #맛보다 향 #디자인의 이유 #본질의 가치 

어딘가 관심이 생기면 그 주변으로 영역이 확대되기 마련입니다. 타로카드를 처음 배울 때는 78장의 순서와 의미 익히는 데도 바빴는데 그 단계를 넘어서고 나니 다양한 스타일의 카드를 갖고 싶어집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유명한 인물들을 테마로 재해석한 그림도 멋있어요. 영화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에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타로카드가 한 장씩 등장하는데 괴기스러운 패턴이 주는 신비로움에 눈이 갑니다. 타로카드가 부채꼴 모양으로 잘 펼쳐지느냐는 재질과 크기의 영향도 상당합니다. 스프레드 천의 질감도 중요한 고려 대상입니다. 제 손에 잘 붙는 것을 고르기 위해 여러 종류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성품 수집을 마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제가 직접 디자인한 타로카드를 만들고 싶어집니다. 저만의 캐릭터와 독특함을 반영한 세상에 하나뿐인 타로카드를 갖고 싶어져요. 그 카드로 읽으면 신통력이 배가될 것 같은 기분이 저도 들고 상대방도 들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세상에 없는 오라클 카드를 제가 직접 기획해서 창조하고 싶은 데까지 생각이 닿습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던가요.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은 가장 기본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유니버설 웨이트 카드로 정착했습니다. 


요리, 캠핑 등의 취미 생활도 예외는 아니죠. 때로는 본 게임을 능가하는 관심과 소유욕이 장비를 향합니다. 요리는 장비전이고, 캠핑의 완성은 카라반린데, 여유가 되면 즐기는 거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미있는 것,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이 훨씬 궁핍합니다. 


그 자체가 컬렉션의 대상인 와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변 소품들에도 역시 눈이 갑니다. 와인 오프너 하나만 해도 종류가 여럿이에요. 와인병만큼 묵직한 것도 있고, 물리적으로 레버리지 효과를 이용해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도록 설계된 것부터 전동식까지 다양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가장 슬림하고 심플한 소믈리에 나이프예요. 여행 갔다가 갑자기 와인이 생각났을 때 마트나 편의점에서 일회용에 가까워 보이는 1,500원짜리를 사도 잘 열립니다. 


다양한 와인을 담아내는 와인잔의 종류는 어떨까요. 같은 레드와인인데도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을 담는 잔의 형태가 다릅니다. 오늘은 와인을 어디에 담아서 즐기면 좋은지 알아봅니다.






레드와인

와인잔 중에서 가장 큰 잔에 마십니다. 공기와 접촉하면 와인의 향과 풍미가 잘 느껴지니 와인을 담고 잔을 가볍게 돌리는 것도 좋습니다. 


화이트와인, 로제 와인

레드와인보다는 작은 잔을 사용합니다. 레드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향이 순하기 때문에 너무 넓은 잔에 담으면 향이 다 퍼져서 약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화이트와인의 과일향을 놓치면 아쉽죠.


스파클링 와인

파티하는 장면에서 웨이터들이 여러 잔 담아서 갖고 다니는 모습 많이 보셨을 거예요. 날씬한 모양의 플루트 잔에 스파클링 와인을 담으면 거품이 올라오면서 와인 위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데 이때 입구가 좁기 때문에 와인의 싱그러운 향이 잘 모입니다. 


주정 강화 와인

일반적으로 알코올 도수와 술잔의 크기는 반비례하죠. 포트나 셰리도 작은 잔에 담아요. 그래도 와인을 돌리면서 향을 맡아볼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와인잔의 모양과 크기는 정말 다양합니다. 대표적인 네 가지 와인 위주로 간단하게 봤는데요, 혹시 특이한 점 못 느끼셨나요. 와인은 이 잔에 담으면 '맛있다'기보다는 '향이 좋다'는 표현을 주로 했습니다.


와인잔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이라도 결국은 한 가지 목적을 지향합니다. 바로 후각이에요. 와인잔은 와인의 향을 최고로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됩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온도 유지예요. 잔의 크기와 와인의 용량은 얼마나 실온에 노출되는지와 관계가 있습니다. 병째로 마셔도, 종이컵에 담아도 와인은 와인입니다. 더 섬세하게 즐기기 위한 연구와 노력의 결과가 와인잔에 다양하게 반영된 겁니다. 모양도 참 아름다워요. 고급 와인잔일 수록 소리도 낭랑합니다. 

 

미드나 영화에서 레스토랑 웨이터나 바텐더들이 패브릭 냅킨으로 와인잔을 열심히 닦는 모습 기억나시나요. 와인잔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잔에 남아 있는 세제 잔여물이나 기타 흔적들은 와인 맛을 해칠 수 있어요. 대충 닦은 리델보다 깨끗한 유리컵이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훨씬 적합합니다.


리델, 우아하고 날렵하고 아름답습니다. 특히 입이 닿는 윗부분 가장자리의 두께는 과학이자 예술이죠. 투박하면 호프집 생맥주잔 같고, 너무 얇으면 마시다가 깨질 것 같아서 불편하거든요. 정작 리델 와인잔을 사용한 횟수는 얼마 안 됩니다. 세척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니 이런 상전이 없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건 유쾌하지 않아요. 그래서 리델은 모셔두고 선물 받은 와인 세트에 들어있던 잔들을 부담 없이 사용하다 보니 그 정도 크기와 수준의 잔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즐겨 쓰는 두루만능종합 와인잔은 전체 용량이 300~350ml 정도 되고, 잔을 채울 때는 40% 이하로 유지합니다. 한 잔으로 마무리해도 부족함이 없고, 더 마셔도 되고, 넉넉하면서도 여백도 있어 저에게는 황금비율입니다.


리델 와인잔들은 아름다운 가게로 갔습니다. 기부금액으로 환산한 영수증에 개당 2천 원, 4천 원 남짓으로 적혀 있더군요. 와인잔이라는 '기능'만 보니 리델이나 다이소나 동등한 가치로 평가받았습니다. 브랜드, 공학적인 설계, 섬세한 디자인은 고려되지 않네요. 목적의 본질과 기능적 역할로서의 존재에 충실할 때 거품은 완전히 걷어집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Winelight' 앨범은 색소폰과 와인잔이 빛나는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이미 어떤 곡이 들어있을지 느낌이 옵니다. 음악을 플레이하는 순간 한강뷰 야경이 떠오르며 와인을 부릅니다.  40년 가까이 된 앨범인데 <Just the two of us>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는 명불허전입니다.  


비슷한 뉘앙스로 신비로운 일들이 잉태되는 밤의 세계로 초대받는 듯한 곡도 함께 들어봅니다. '데이브 그루신'의 <Bossa Baroque>, 캠페인 배경 음악으로 쓰여 익숙하죠. 'Soweto String Quartet'의 연주곡으로도 많이 사랑받고 있는데 원곡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현악기의 선율이 깊은 가을을 닮은 쓸쓸하고 울적한 서정을 경쾌하게 표현하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좋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elwwYuYGn0&list=PLX6-mqvhAmjR4aUZcBi7N9TDfKqgsQYab&index=5

Just the Two of Us / Grover Washington, Jr.



https://www.youtube.com/watch?v=S2BLCUm2blc

Bossa Baroque / Dave Grusin




https://www.youtube.com/watch?v=jfKppQJnos0&list=PLiMtYjkQFxr5T19jz80WYyz72sX24DlRe

Bossa Baroque / Soweto String Quartet



* 이미지 :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Winelight> 앨범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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