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빈 Oct 18. 2024

디캔팅, 와인이 열리는 순간

#침전물 거르기 #신선한 공기와 만나다

냉장고에 며칠 둔 막걸리를 새로 개봉할 때면 한 번은 생각해 봅니다. 맑은 부분만 조금 따라서 깔끔하게 맛만 볼까, 아니면 흔들어서 일을 크게 만들까.  


조심스럽게 마개를 오픈해서 투명한 유리잔에 따르면 연한 레몬빛의 상큼하고 어린 화이트와인으로 보입니다. 책상에 가져와서 하던 일하며 커피 한잔하듯 가볍게 즐기고 끝날 일이죠. 사실 가장 좋은 점은 흔들고 넘치는 번거로운 과정이 생략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걸리의 진수를 제대로 즐기려면 고루 섞어야 제맛입니다. 흔들면 스파클링 되는 발포성이라 감수해야 할 절차가 있습니다. 첫 잔만 잘 따르면 그다음부터는 쉬운데 그게 꾀가 나네요. 탁주에는 안주가 있어야지요. 식탁에 수저를 세팅하고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나오니 일이 커집니다. 오늘 밤에도 (혹은 낮에도) 배불러질 예정입니다. 맑은 부분만 조금 마실 걸 싶어집니다.


침전물을 말하면서 디캔팅이 한 번 나온 적 있어요. 숙성되는 동안 와인의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해주고 어느덧 덩어리 신세가 되어 와인의 질감을 해치는 존재가 된 침전물에 초점을 맞췄었죠. 오늘은 슬픈 이별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와인을 즐기기 위한 디캔팅입니다.


막걸리를 맑게 마시려고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따를 때처럼 위쪽의 맑은 와인만 디캔터로 옮깁니다. 이때 배경을 어둡게 해놓고 촛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침전물이 조금이라도 섞여서 들어갈까 봐 와인병의 어깨를 비춰 보기 위해서예요. 일반 실내조명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데, 필요한 순간에는 일종의 연출로 시도해 보셔도 괜찮을듯 싶습니다.

 

'와인병의 어깨'라는 표현이 나왔는데요, 어딘지는 아실 것 같아요. 재밌는 거 하나 알려드릴게요. 


보르도 와인병은 체격 좋은 남자가 슈트 입은 모습처럼 어깨 부분이 각이 져 있고, 부르고뉴 와인병은 한복을 곱게 입은 여인의 어깨선처럼 부드럽고 둥글게 떨어집니다. 


여기서 잠시, 맛과 향을 두고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을 왕과 여왕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할 때도 많아요. 결론을 내거나 고증은 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정작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은 어떻게 불려도 신경 쓸 것 같지 않아요. :)


다시 와인병의 어깨로 돌아올게요. 우연이 그대로 굳어 관습이 된 역사도 많겠으나 대체로 세상만사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디캔팅 할 때 병의 어깨 부분이 없다면 위쪽의 맑은 와인을 거를 때 곤란할 거예요. 각진 부분 덕분에 그곳에 침전물이 고이면서 와인을 따를 때 흘러들어가지 않습니다.


부르고뉴 와인은 숙성 중에 침전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몇 번 있어요. 그리고 병입 전에도 여과를 하기 때문에 침전물이 많이 안 생겨요. 그렇기에 우아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을 어깨로 가질 수 있습니다.


디캔팅을 하는 동안 잠자고 있던 와인이 깨어나면서 공기와 만나게 됩니다. 디캔팅의 또 다른 이유이자 긍정적인 효과에요. 공기와 접촉하면 풍미가 증대되면서 독특한 향기를 불러옵니다. 집에 디캔터가 없으니 마시기 전에 마개라도 미리 열어둘까요? 공기에 노출되는 면이 너무 적어서 아쉽게도 효과는 없습니다.


보이는 곳이야 수시로 닦으며 살지만 집안 구석구석 쌓였을 먼지가 적지 않을 텐데 그동안 마음에 적체된 먼지는 얼마나 많을까 싶어집니다. 가구 뒤는 손이 닿지 않아 털어내지 못한다지만 마음은 외려 너무 가까워서 돌보는 걸 종종 잊습니다.


와인을 와인답게 해주느라 섞여 있었던 침전물도 와인을 개봉하는 때가 되면 걸러내야 하듯이, 삶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쌓인 물건과 감정의 폐기물, 마음의 먼지도 때가 되면 걸러내는 게 좋겠어요. 계속 같은 상태로만 있으면 있으면 햇빛도 못 본채 와인의 삶은 그냥 저물어요. 포도로 태어나 병입되기까지의 길고 긴 여정을 생각하면 아까운 일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면 신선한 공기와 접촉하며 삶의 향과 맛이 달라질 수도 있고, 먼지 쌓인 소재가 참신한 아이디어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 기회가 오면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한때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스티브 바라캇의 두 앨범이 있어요.「A love affair」,「All about us」중에서 침전물을 걸러내는 마음으로 <No regrets>, 신선한 공기와 만나 새롭게 날아오르는 마음으로 <Flying> 들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r7g560FVhY

No Regrets  / Steve Barakatt



https://www.youtube.com/watch?v=UZqKJYjSe20

Flying  / Steve Barakatt




이전 24화 어둡고, 습하고, 서늘한 곳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