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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Oct 22. 2024

전람회의 그림에 와인 페어링을 한다면

# 와인 즐기는 순서 #와인잔 교체는 필수 

전가복과 어향동고가 대표 메뉴인 중식당에서 약속이 있던 날이었어요. 세 명 모임에 한 사람이 늦게 도착한다기에, 요리 두 개는 양이 많고 식으면 맛이 없으니 어향동고를 먼저 달라고 했더니,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지배인이 전가복을 먼저 권합니다. 풍미가 강한 어향동고를 먼저 먹으면 나중에 깔끔함과 담백함이 매력인 전가복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전가복 가격이 두 배라 매출을 올리려는 심산인가 싶으면서도 어떤 뜻인지는 충분히 전해졌습니다. 해산물의 신선함을 강조하고자 향신료를 최소화한 시그니처 메뉴를 먹고 아무 맛이 없더라는 평을 듣게 할 수는 없었겠다 싶어요. 은은한 맛이 좋은 전가복이 거의 없어질 무렵 나머지 일행이 도착해서 어향동고를 주문하고 이어서 탕수육과 짬뽕도 시켰습니다. 탕수육도 자극적인 향신료를 쓰지 않는 음식인데 어향동고에 가려질 맛은 아니었는지 주문을 만류하진 않더군요. 고소한 감칠맛이 좋았어요. 무엇이든 튀기면 맛있다는 조리법의 승리였습니다.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와인 뷔페 프로모션을 하면 여러 종류의 와인을 다양하고 맛있는 안주와 함께 즐길 수 있죠. 순서를 잘 지키면 모든 와인의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가벼운 와인 먼저, 무거운 와인 나중에


이것만 기억해도 모든 상황에 응용할 수 있어요. 가벼운 맛의 와인을 먼저진한 맛의 와인은 나중에 마십니다. 순서를 반대로 하면 가벼운 맛의 와인이 가진 산뜻하고 경쾌한 맛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요. 어향동고에 전가복이 묻히는 원리입니다. 


구체적으로 봅니다. 


어린 와인 → 오래된 와인

어린 와인의 신선한 매력을 느낀 후에, 오래된 와인의 짙은 숙성향을 느껴보세요. 


심플한 풍미  복합적인 풍미

적당한 가격의 와인은 일반적으로 맛이 단순해요. 고급 와인일수록 맛과 향이 풍부한 복합미를 가집니다. 숙취로 물든 아침에 일어나 첫 입에 먹는 맑고 담백한 콩나물국의 감동과 매콤낙지볶음에 곁들이는 콩나물국의 존재감은 사뭇 다르죠. 

 

드라이 와인  스위트 와인

드라이 와인의 매력은 깔끔하면서도 풍부한 향이죠. 스위트 와인을 먼저 마신 후에 드라이 와인을 나중에 마시면, 드라이한 맛만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깊은 풍미는 덮입니다. 어려운 맛은 부각되고 매력은 사라지네요.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화이트와인보다 짙은 레드와인을 먼저 마시면 그 무게가 입안에 남아 화이트와인의 과일 향을 충분히 즐길 수가 없어요. 






원칙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원하는 대로, 입맛에 좋은 대로 즐깁니다. 


국수를 넉넉히 삶았을 때 와인의 원칙대로라면 [잔치국수 → 간장비빔국수 → 고추장비빔국수] 순서로 즐겨야겠죠. 그런데 매운맛이 당길 때에는 화끈하게 고추장비빔국수 먼저 먹고, 깔끔한 잔치국수로 마무리해도 좋잖아요. 간장비빔국수를 먹다가 느끼해서 고추장비빔국수를 먹으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죠. 세 가지 종류 다 먹고 싶고 위장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으면 그날 기분에 따라 가장 먹고 싶은 맛부터 먹는 겁니다. 


술이 약한 사람은 순서 지키다가 정작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는 순서에서는 이미 취해서 감각이 둔해질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좋아하는 것부터 드세요. 와인이 어려운 건 원칙과 방법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인듯싶어요. 와인을 더욱 잘 경험하고자 만든 것들인데 오히려 이런 것들이 발목을 잡아서 충분히 즐길 수 없다면 목적과 수단이 바뀌는 거니, 즐기는 사람이 편한 방식을 가장 우선으로 두는 게 좋겠어요. 내가 좋다 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만 않으면 어떻게 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여러 종류의 와인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을 때 와인잔을 하나만 사용하면 그 안에서 이 맛 저 맛이 뒤섞이니 새로운 와인은 새 잔에 담는 게 좋습니다. 시음회처럼 사람 수와 와인 종류를 감당할 수 없다면 생수를 준비해서 와인이 바뀔 때마다 잔을 가볍게 헹구는 방법도 있어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10곡으로 구성된 피아노 모음곡입니다. 라벨의 관현악 연주용 편곡이 유명하죠. 코스로 즐기는 와인 시음회 같습니다. 악장 사이에는 익숙한 선율의 프롬나드가 등장하는데 마치 와인잔 교체하는 타이밍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악장마다 어떤 와인이 잘 어울리는지 페어링 하면서 들어봐도 재밌겠어요. 지난 8월 말, 투간 소키예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연주로 이 곡을 듣고 왔는데 그때만 해도 날씨가 더워서 언제 여름이 가려나 싶었어요. 어느덧 10월의 멋진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는 가을의 한가운데입니다. 공연 날짜를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한 연주를 들어보고 갔는데요, 그 중에서 정명훈의 지휘, KBS 교향악단이 함께한 영상으로 준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Nbs9MCKjSI

전람회의 그림, 무소륵스키 / 지휘 정명훈, KBS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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