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미숙하게나마 조금씩
올해 초, 교토의 한 독립서점에서 들춰봤던 책이 기억에 맴돈다. 일본어에 관해서는 무지한 상태라 책의 표지만 보고 파파고로 해석하는 것을 반복하며 책방을 구경했고, 선반에 기대어 놓인 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한 마을의 건물과 도로가 첫 장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흥미가 생겨 핸드폰을 들고 번역기로 훑어보니 화면에는 이런 제목이 나왔다. ‘우리 동네 기록’.
펼쳐본 페이지에는 사람들이 손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동네를 돌아본 듯한 그림이 있었다. 그 옆에는 누가 봐도 인터뷰 형식인 듯한 글이 실려 있었는데, 인상 깊었던 사건을 말하며 기억을 회상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삐뚤빼뚤한 선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흰 종이에 그려낸 동네는, 자신의 보금자리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동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어릴 적의 동글동글한 느낌을 주면서도 내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듯한 단어. 왠지 이 단어가 앞에 들어가면 어색한 공간도 바로 친숙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24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한 동네에서 살아왔다. 이사를 가더라도 저 멀리 가는 것이 아닌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정착할 뿐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삼전동이라는 빌라촌을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 흰 종이를 펼쳐 놓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집을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기억은 몇 번 그리지 않아 희미해지고, 그림에는 인상 깊었던 공간, 자주 갔었던 공간이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집들을 먼저 그렸고, 골목에 박혀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한 이정표가 되는 장소들이 그다음을 차지했으며, 내가 다녔던 학교, 종종 들려서 먹을 것을 사 먹었던 마트, 갑갑할 때 나와서 바람을 쐬던 공원과 같이 내 기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장소들이 나머지를 채워줬다. 신기하게도 나의 기억에서 사라져 지금은 가지 않는 장소들도 어느새 내가 종이에 그려 넣고 있었다.
그리다 보면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정류장 앞에 쌓인 눈을 발로 차고 놀았던 기억, 등교 시간을 쪼개 문방구에 들러 불량 식품을 사 먹었던 기억, 인사를 하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셨던 공인중개사 아주머니와 순대 트럭 아저씨. 내가 장소를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 마치 “남는 건 사진뿐이야.”라는 말과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은 스쳐가는 일상의 공간이 되겠지만, 기록하는 순간 나만의 애틋한 장소가 된다.
백지에 그려 나간 기억을 바탕으로, 나만의 장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씩 써내려 한다.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 생각으로만 해왔던 이야기들이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고 당시의 감정도 다시금 바라보는지라 퇴색되었을 수 있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소들을 글로 치환하며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과 함께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 자신을 인터뷰이로 삼아 나의 기억 보따리를 다 풀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순간이라 생각한다. 내 기억을 회상하는 단계에서 마무리하면 개인의 이야기에서 그치지만, 여러 사람들의 기억 지도가 쌓이게 되면 공동의 기록이 될 것이다. 종이에 그려낸 기억들을 겹쳐보는 것을 통해 한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간은 어떤 곳일지, 그들이 공유하는 경험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간 공간들이 우리 동네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는지, 그들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곳을 나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아보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같이 공유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의미 있게 맺는 때가 언제가 될지, 그동안 몇 명의 기억을 기록할 수 있을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예상이 가지 않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첫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