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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영 Oct 13. 2023

빌라는 나에게 놀이터였다

0-2. 어린 시절의 집

집은 버블로 그리는 게 맘 편하다.

우리 가족이 4층에서 살았을 때, 할아버지 댁은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나에게 301호는 온통 나무로 이루어진 고급진 갈색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나오고, 거실에 들어서면 정면에 있는 미닫이문 너머로 부엌이, 왼편에는 2개의 방과 화장실이, 뒤에는 할아버지의 안방이 있었다. 앤틱 소파와 TV가 있는 거실에서 온 가족이 모여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작은아버지와 고모도 자주 왔으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셈이었다.


부엌 왼편에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상자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어 문을 열기는 커녕 그 앞까지 가지도 못했다. 왕래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상자들이었기에 이를 하나씩 치워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건넌방에 세를 주었기에 셋방과 이어지는 문을 막아둔 것이었는데, 세입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절대 문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방 너머에 있는 존재를 무서운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상상하곤 했다.


위층에 살았을 때도 할아버지 댁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래 층으로 내려갈 땐 매번 애착 이불을 갖고 갔는데, 내가 들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작은 키로 이불을 더럽히지 않고 한 층을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보다 큰 천은 바닥에 질질 끌려 온갖 먼지를 다 쓸고 다녔다.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청소는 매번 내 몫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는 보다 못한 부모님이 이불의 끝자락을 잡아줬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려가는 나의 모습은 흡사 이모님이 드레스를 들어주고 있는 신부였다.

할아버지와 나.

안방 한 켠에는 자개장이 있었는데, 그 특유의 매끈하면서도 튀어나온 질감이 좋았다. 이불로 켜켜이 쌓인 공간에 들어가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파묻혀 있으면 그것만큼 아늑한 공간은 또 없었다. 부엌에서 의자를 가져다 이불을 여러 겹 덮어두어 생긴 보금자리 같은 공간을 즐기기도 했지만, 가장 편안했던 것은 자개장 안이었다.


거실 한 켠에 위치한 2개의 방 중 왼쪽에 있었던 방의 문틀에는 작은아버지가 사온 그네가 걸려 있었다. 오톨도톨한 질감의 플라스틱 재질로 되어있었는데, 촉감이 신기해서 그네를 만지며 놀기도 했다. 얼마나 그네를 갖고 놀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느낌만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게 신기하달까.


할아버지가 잠실 3동으로 가시고나서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4층에서 3층으로 이사를 갔다. 안방은 내 공부방으로, 아빠가 쓰던 방은 침실로, 작은아버지가 쓰던 방은 서재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초등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게 그 당시 나의 일상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감나무.

우리 집의 한 켠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던 ‘ㄴ’자 모양의 공간이 있었는데, 눈이 오는 날에는 놀이터가 되었다. 겨울에 들어서고 눈이 내리면 우리 가족은 빗자루와 삽을 들고 나와 입구 계단부터 건물의 앞까지 쓸곤 했는데, 주차장의 눈을 쓸어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어린아이의 4배 정도 되는 좁은 폭의 공간에서 혼자 빗자루질을 하고 있으면 온전히 나만의 공간인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꺾이는 부분에는 담장을 넘어서는 큰 감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바람이 감을 떨어뜨려주진 않을까 하며 하염없이 나무를 쳐다보는 것도 시간 보내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감이 옆집으로 넘어가면 곤란하다며 긴 막대기를 가져와 감을 따곤 했는데, 주워서 먹어본 기억은 딱히 없다.

잠긴 옥상.

빌라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옥상이었다. 5층에는 옥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철문이 있는데, 그 특유의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녹색 바닥의 옥상은 운동장과 비슷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발 디딜 물건을 찾아 밟고 올라서면 보이는 삼전동의 풍경, 사촌과 함께 뛰어놀기 좋은 면적과 눈이 오면 새하얀 눈밭으로 변하는 모습은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던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내가 맨 처음 신세를 졌던 이 빌라는 말 그대로 하나의 놀이터였다. 2층부터 꼭대기층까지 계단실을 따라 끊이지 않고 올라가는 유리창이 주는 깊이감은 일종의 호기심을 주었고, 매 층마다 건물 바깥으로 나 있는 복도는 하나같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빌라의 공용공간이 주는 다양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게, 간판, 외장재. 많은 게 바뀌었다.

지금은 그 쪽으로 잘 가진 않지만 가끔 생각이 날 때는 일부러 예전 집 앞을 지나가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과 다른 모습이 낯설게 다가온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있던 공인중개사는 사라지고 빈 공간만 남았으며, 가구 매장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공동 현관 입구에는 도어락이 달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건 사람이나 장소나 비슷하지만, 추억이 담긴 공간을 오랜만에 봤을 때 다가오는 저릿함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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