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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영 Oct 12. 2023

기억의 첫 장에 자리한 장소

0-1. 어린 시절의 집

붉은 대야에 들어간 나.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모습이다. 내가 살던 가장 첫 번째 집은 몽글몽글한 상상 속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얼핏 생각은 나지만, 누군가 가장자리를 갉아먹은 듯이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다. 유아기 시절인지라 어떻게 그 당시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것은 오래된 영사기가 필름을 한 장씩 넘기듯 뚝뚝 끊기는 기억의 연속이다.


우리 가족은 아직도 종종 옛 앨범을 들춰보는데, 그때 부모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주제 내가 지금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시절 이야기이다. 내가 잘 떠올리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만 공유하는 기억을 듣는 것은 마치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책을 듣는 기분이다. 이를 당신과 공유하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거쳐간 장소들을 하나씩 풀어가려 한다.

나름 건축학도라 잘 그리고 싶지만, 너무 가물가물하다.

흔히들 빌라로 부르는 다세대주택의 4층에 있는 집이 나의 첫 번째 집이었다. 작은 몸으로 4개 층의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바깥과 면하는 좁은 복도를 지나면 우리 집이 나왔다. 문을 열면 현관과 맞닿아 있는 부엌부터 아빠가 쓰던 방과 거실 겸 안방의 역할을 하는 방이 모두 보이는 구조였다. 현관이 딸린 부엌을 중심으로 방 2개와 화장실이 붙어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부모님이 일을 나간 동안 할머니께서 나를 돌봐주셨다고 한다. 퇴근하는 엄마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가 얼마나 설렜는지. 열쇠가 철컥-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기 전에 아빠와 같이 이불에 들어가서 없는 척을 하기도 했고, "어디 갔을까?"라는 말로 엄마가 받아주면 이때다 싶어 이불을 들춰 반갑게 맞이하곤 했다. 엄청 어렸을 때는 엄마가 회사에서 일을 하며 집을 비우는 동안 엄마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곁에 있지 않으면 멀리 떠나간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어릴 적의 나는 꽤나 말 잘 듣는 아이였다고 한다. 부엌에서 엄마가 일을 할 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엄마만 바라보던 그런 아이. 부엌에는 위험한 것들이 잔뜩 있다며 주변에 있질 못하게 했는데, 내 키와 비슷한 서랍장에서 나오는 부엌 잡동사니들은 어린 아이의 시선을 끌기에 매우 충분한 것들이었다.

02. 01. 18.

엄마, 아빠, 나 이렇게 3명이서 가족 앨범을 들춰볼 때는 항상 화장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사진 앞에서 잠시 멈추고 그때 이야기를 한다. 김장하거나 이불 빨래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붉은 대야 안에 어린 시절의 내가 들어가 있는데, 그렇게 작았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도 이 말을 할 때면 부모님은 내가 정말 요만한 시절이 있었다며 자신의 팔뚝을 내게 들이미시곤 한다.


거실 겸 안방으로 사용하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부엌에서 오른편에 위치했다. 방에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TV가 올려진 문갑이 있었는데, 하루의 시작은 TV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영화 CD를 들고 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날엔 부모님과 TV 앞에 모여 같이 영화를 봤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에 나오는 가오나시를 무서워해서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다른 데로 도망가곤 했다. TV로 스포츠 경기가 열리던 어느 날 방에서 걷다가 갑자기 넘어져 문갑 모서리에 부딪혔다고 하는데, 이때 얻은 흉터는 아직도 왼쪽 눈가에 남아있다.

02. 03. 01.

컴퓨터 방 또는 아빠 방으로 기억하고 있는 곳은 거실의 오른편에 위치한 공간이었는데, 엄청 뚱뚱한 옛날 컴퓨터와 옷가지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상의 서랍장을 열면 화장품과 여러 물건이 나왔는데, 이것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장대 서랍 앞에서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을 얼굴에 붙인 채 서랍을 뒤적거리는 내 사진도 매번 나오는 이야깃거리였다. 아빠가 장난 삼아 몇 개를 내 얼굴에 붙였는데, 갑자기 내가 나머지 포스트잇을 남은 부분에 붙이면서 놀았다고 한다. 포스트잇이 피부에 오래 닿으면 뭔가 움찔하게 만드는 이상한 감촉이 있는데, 어릴 때는 그걸 어떻게 참았나 싶다. 눈 앞에 보이는 물건을 전부 갖고 놀고 싶었던 그 당시의 어린 마음이었을까?


이 모든 건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들이다. 내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미지들을 보기 좋게 글로 바꿔 쓰는 이유는 지금까지 거쳐왔던 장소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정리해보고 싶은 게 가장 크다. 어릴 때 지냈던 4층에 위치한 집은 '내가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이런 의미에서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은 나 자신을 훑어보는 행동이라고 봐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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