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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Nov 16. 2024

제사

가족에 관한 이야기 1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동생과 시간이 맞아 오랜만에 영상통화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함께 집에 있던 엄마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은 주말이었는데 엄마는 바쁘다며 통화에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캐나다로 오면서 깜빡하고 있었던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강원도 시골의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는 올해 설 명절부터 모든 제사를 큰아들인 우리 아빠의 집, 곧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왔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으나 우선 아들 셋인 친가 중 우리 집을 제외하면 모두가 기독교여서 함께 준비는 하지만 제사에서 절을 하는 사람은 우리 가족들뿐이었고, 주로 평일이었던 할아버지 제사에 엄마는 집에서부터 제사상에 올릴 음식 대부분을 이틀에 걸쳐 준비해 그날 밤 제사를 치르고 당일치기로 강원도와 인천을 오가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제사를 두고 간소화를 하자느니, 큰집인 우리 집으로 옮겨가자느니 최근 몇 년 간 가족들과 꽤나 언쟁 높은 논쟁들이 있었고 할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많이 편찮아지시고 준비하시기 힘드니 큰집인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로 한 것이 결론이었다.


 친가에 대해서는 정말로 할 이야기가 많은데 큰아들에게 아들이 생기길 바랐던 우리 할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다행히도(?) 딸 셋인 딸부잣집이 되었다. 만약에라도 누군가 아들이 나왔다면 우리 집은 남녀차별주의 가족의 표본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손자는 아니었지만 큰 손녀로 시골에 가면 엄마 아빠 옆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서 잠이 들고, 새벽같이 일어나 할아버지와 함께 눈을 쓸고 저수지 아침산책을 따라나서는 나를 참으로 예뻐하셨다. 그러나 나는 20살이 넘어갈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명절이면 할머니와 며느리들이 새벽 네시, 다섯 시부터 일어나 제사상을 준비하고 제사를 치르는 동안 부엌에서 나오지 않으며 제사 보조를 하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가족들이 먹을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하고는 성묘에 가는 아들들이 가져갈 제기와 과일, 포를 준비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모든 것을 할 동안 아들들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식을 하는 동안 옆에서 술을 마시거나, 제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단 제사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일상생활에서도 아빠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 적이 없고 가족들이 함께 돌린 빨래를 널거나 개어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나아진 것이 아빠가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는 것. 똑같이 일을 하면서도 시댁의 제사상을,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며느리들의 모습을 뒤늦게 알아채고 나서부터는 아빠와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나름 평화로웠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은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채 아빠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던 우리들과 아빠, 그리고 엄마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사 문제로 엄마가 고생을 무릅쓰고 우리 집으로 가져가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친가의 유일한 손자인 막내 작은 아빠의 아들이자 초등학생인 친척동생이 물려받아야 할 제사를 딸만 셋인 우리 집으로 가져가는 것에 탐탁지 않아 했던 것 같다. 내가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간소화를 하든, 준비하는 엄마가 편한 방식으로 하자고 했을 때 딸인 나는 제사를 물려받을 게 아니므로 빠지라는 식이었다. 시골에서 제사를 며느리들만 준비하는 것에 대해, 모든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골집에서 아빠에게 뭐라고 할 때면 할머니는 아빠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나를 조용히 타이르곤 하셨다.


 우리는 어느새 그걸 용인해 주는 할머니와 엄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하루이틀 그런 것이 아니니 포기하고 넘어가겠다고 하는 엄마에게도 우리는 엄마가 그렇게 봐주면 안 된다고 엄마도 잘못한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매 명절마다, 집안에서도 그런 답답한 모습들을 보고 언성을 높이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한창 비슷한 문제들로 아빠와 자주 다퉜던 나는 당시 회사가 멀다는 핑계로 자취를 시작했고, 그 뒤로 언성을 높이며 아빠와 대적하는 것은 동생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집안일을 함께 해야 한다고 할 때면 아빠는 너네는 똑바로 하고 있느냐는 둥, 엄마 편만 들고 아빠를 무시한다는 듯한 반응만 돌아왔다. 물론 우리도 그동안 아빠와 크게 다를 바 없기에 할 말이 없는 것은 알지만 잘못된 것을 알게 된 후 함께 사는 집에 집안일을 나눠하자는 것이 왜 아빠를 무시하는 행동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이렇게 큰아들을 애지중지 키워왔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다다르게 된다. 할머니에 이어 결혼 후 아빠가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아무에게도 쓴소리 들은 적 없이 살게 한 엄마까지도 답답하게 느껴지곤 했다. 엄마가 늘 말하듯 아빠는 원래 저런 사람이라 안 바뀐다고 했을 때 아무리 같은 문제로 말다툼이 나도 변하지 않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아빠를 우리 또한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지만, 곧 그 생각에 이르게 될 때쯤에는 또다시 화가 솟구칠 뿐이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싶었다. 과연 그 모든 것을 순응하고 살아갈 때 모두가 평화로운 것이 맞는지. 우리는 과연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누군가의 사위나 아들이 될 수 없는 우리가 누군가의 며느리나 딸이 되어 살아갈 때 평등한 위치에서 평등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또한 우리 할머니니와 엄마와 나까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나의 자식에게는 그렇지 않은 삶을 물려줄 수 있는지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에 잠시 잊었던 아빠와의 다툼들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나는 아마도 되돌아가더라도 다시금 아빠와 자주 싸우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가족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왔던 우리 자매들과 더불어 아빠가 엄마가 그동안 혼자 짊어지고 있었던 무게들을 고르게 분배해 살아가길 바란다. 아빠에게 화를 낼 때면 당연히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엄마가 설거지와 청소를 해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어떻게 하면 그게 당연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도 돌아가면 내년 추석이 내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맞이하는 첫 명절일 텐데 말다툼과 기분 상함으로 끝나는 과거의 명절이 아닌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기분 좋게 끝나는 명절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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